진부한 시작이 싫지만, 7살 즈음? 처음 이 집에 이사왔을때 기억이 난다. 정확하게는, 그날의 공기가 기억난다. 낯선 환경에 대한 가벼운 긴장 때문이었을까, 오들오들 이가 부딛힐 정도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파랗고 높았던 하늘이 있었다.
파란색 용달에 우리집 물건들이 화려한 조선벨벳 ( 융털 이불) 에 싸여 있었고, 그 짐들은 안방 작은 창문을 통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우리 집은 크지 않지만, 소박하고 따뜻했고 어린 나에겐 더 없이 근사한 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이었다.
장미맨숀으로 이사 오기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기억하는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세 걸음 걸으면 거기가 우리집 이었다. 꿈을 꾼 듯한 기억이라 여러가지 tv 드라마로부터 조작된 기억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을 내 어릴적 꼬질꼬질 했던 사진으로 알고있었다. 그냥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집이 신기했다.
이층집이라니, 이제 라푼젤 처럼 창문으로 밖을 내다 볼수 있다는건가? (단독 이층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한 동에만 12세대가 같이 사는 다세대 연립주택이므로, 이동네 라푼젤은 적어도 8명 이상 산다는것만 빼고 완벽했다)
그리고 화장실에도 작은 창문이 있어서 환기가 잘 되는 끝집 이었다. 한 겨울 얼음 양변기에 앉는게 두려워 화장실 참다가 변비에 걸린 것과, 샤워를 못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소녀에게 지독하게 험난한 일용직 인부의 냄새가 났던건 아주 미세한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고, 잊을만 하면 시골에서 올라오던 객식구들이 있어서 집에 방이 세개였어도 혼자 방을 써본 적은 없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출장을 가거나 혼자 방을 쓸때면 늦게까지 잠을 못잔다.
박복은 스스로가 개척하나 보다.
늘 공간을 나눠 가졌다. 나누는게 익숙했고 당연했다.
공간의 경계도 없었다. 주말의 명화를 볼때면 차가운 마룻바닥이 내 방이 되주었고, 손님이 오실때면 안방에서 죽은척도 해봤다. 어른들께 인사하기 싫어서.
언니와 주로 방을 같이 썼는데, 몇년지나 고등학생이 된 언니는 거의 집에 없었고 깜깜한 밤이 되고 나서야, 바퀴벌레처럼 기어들어 왔다. 합창단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합창 연습은 원래 밤에 하는걸로 알고있다.
남동생은 남자라 혼자 방을 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객식구가 자주 와 계셔서, 항상 안방 바닥이나 거실에서 이불 펴고 자고 있었고, 오가며 밟히는게 그에게는 아침 자명종 같았다고 한다.
어쨋든 이렇게 우리의 장미 맨-숀 206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그 배경에 늘 존재했던 장미 맨-숀. 그리고 사람들.
그 곳을 기억하면,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 앨리스나 인터스텔라 처럼 다른 공간을 여행하는 여행자 같다.
놀토가 없던 그 시절, 일주일 6번 학교가던 그 길목에 지금은 대형마트가 들어섰고, 장미 맨-숀을 가르던 가동과 나동 사이의 공터 위에는 화려한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 장미 맨숀 흔적조차 찾을수 없기 때문이다.
2층에서 라푼젤을 꿈꾸던 내 기억은 20층 라푼젤에게 등기부 등본과 함께 양도 했다. 내 낭만기는 그렇게 잔인한 자본주의와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위해 희생되었다.
시골 할머니 집 저수지에 가면 떠있던 운무 처럼 아련하고 아득하게- 하지만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내 어릴적 최고의 낭만기를, 나만 기억하던 그 낭만을 글로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