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건강으로 피워내는 삶을 가꾸다
불안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지만 나는 때때로 이게 떼어낼 수 있는 감정이라고 착각한다. 불안은 떼어내는 게 아니라 덮어버리는 건데 말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든 적게 걸리든 다가오는 설렘과 기대로 다 덮어버렸다. 이전에 느꼈던 실체 없는 불안 따윈 생각도 나지 않게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주어지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나를 향한 타인의 기대도 커졌다. 결국 그 설렘과 기대는 과도해져 나를 또다시 누르기 시작했고, 오만가지 의심과 불안으로 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동시에 행복하고도 괴롭게 만드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공통분모, 회색지대에 있는 것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증폭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터진 눈물은 여러 가지 감정의 복합체였다. 기쁨, 설렘, 부담감, 불안, 긴장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얽혀 쉴 새 없이 흘렀다.
분명 내가 원하던 것들이었는데...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눈앞에 두니 문득 두려워져 겉으로만 행복해하고 있다. 속으로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말이다. 처음이 서툴고 무서운 건 당연한 건데 왜 더 잘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또다시 타인과 비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기로 몇 년에 걸쳐 계속 다짐했는데 말이다. 이번에 또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진심이었다. 분명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부터 내 꿈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내 일상에 스며들다가 꿈 중 하나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농도 짙은 간절한 꿈으로 말이다. 그러자 욕심이 났고, 그 욕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저 위의 꼭대기를 바라봐야만 했다. 현실과의 괴리가 엄청 커진 꿈을 바라보니 부가적인 감정들이 따라왔다. 이 패턴을 잘 알고 있다. 이때 해결방법은 당장 눈앞의 작은 성취부터 이뤄나가는 것이겠지. 알고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내가 바라던 삶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딱 하나의 나쁜 습관만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자꾸 앞과 옆과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려서 넘어졌을 때 멈추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회복이 더디다. 그걸 알기에 처음부터 무너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더 중요한 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이란 걸 알고 있다. 나의 반동은 약하다. 결국에는 다시 일어서지만 그 텀이 길다. 그걸 알기에 조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초반을 불태운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듯이, 나도 내 열정이 타오를 때 모든 것을 초반에 쏟으려 한다. 체력 분배를 해야 한다는 건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이 저 멀리 뛰어가서 몸이 따라잡지 못하게 되며 엇박을 만들고 만다. 무기력해지지 않아서 좋은데 나아가고 있고 주변에서도 다들 나보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정작 나 스스로만 불안해하고 있다. 이제는 타인의 말이 와닿지 않는다. 가끔 이 과도한 욕심이 잘못됐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나를 갉아먹다 결국 내가 쌓은 모든 걸 무너뜨릴까 봐 숨을 고르려고 해도 욕심이 나를 더 밀어붙인다. 욕심 자체는 죄가 없다. 다만 뭐든 과하면 안 되는 법. 욕심이 커지면 불안이 된다. 불안이 커지면 몸이 아프기 시작하고 면역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 멈춰서 심호흡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해서 혼란스럽다. 분명 나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뭘 하려고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불안하고 끊임없이 뭘 해도 불안하다. 맞다. 불안은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지. 불안을 가지고 가려면 잠시 뇌를 속여야 한다. 불안을 다른 감정으로 뒤덮는 작업을 해야 해서 넷플릭스도 보고 나에게 쉼을 주었다. 잠시 나아졌다. 그러다가 또다시 불안해져서 결국 정신적으로 지쳐 눈물이 터졌다. 한바탕 울고 나니 나아졌다가 이제는 우는 게 지쳐서 평온해졌다. 그때서야 다가오는 초심이 반가웠다. 내 마음건강이 내 인생의 1순위, 그걸 기반으로 모든 걸 해나가기로 했던 나의 다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