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향한 힘 있는 글 외침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나를 작가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좋은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나는 글쓰기가 좋다. 책을 꼭 내어야지만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요새는 인터넷으로도 글을 잘 쓰면 작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를 찾아가는 이유를 글쓰기에서 찾았다.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고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였기 때문에 나를 그린다.”-프리다 칼로의 일기에서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겪고 18세에 교통사고로 몸의 뼈를 맞추는 수술만 서른두 번을 했다.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평화롭지 못했다.
프리다가 그린 ‘부서진 기둥’ 자화상을 보면 온 몸에 못이 박혀있고 표정은 우울하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그렸을지 가늠이 안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발견한다. 지금껏 쓴 글은 아주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글이 대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외면은 항상 친절하고 밝고 긍정적이다. 그렇다고 내면을 숨기고 가식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다. 글을 쓰며 나를 더욱 알아가는 중이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나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면 나의 열 손가락은 타자 위에서 춤을 춘다. 손가락은 신들린 듯 왈츠를 추기도 하고 블루스를 추다가 멈추기도 한다. 글을 쓰는 그 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나는 관계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행복한 비명, 괴로운 비명.
항상 좋을 수만도 나쁠 수 만도 없지만 나의 20대는 갑자기 대포가 펑! 터지는 순간이 많았다. 숨을 겨를도 없이 당하고 만다. 장미꽃으로 위장한 강력한 대포다. 잘못하면 밟혀서 짓이겨진다. 예전 2D 만화 톰과 제리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이 자동차에 밟혀 납작해져서 빨래처럼 나풀나풀거리며 날아가버리는 것 같다. 사실 날아가고 있는 캐릭터는 내가 아닌 옆의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비열한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게 외면한 내가 더 아팠다. 간접 가스 라이팅이라고나 할까? 직장 내에서 서열의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나는 사회생활과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참 어렸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는 게 아니었는데. 회피는 또 다른 아픔을 재생산했다.
친절한 가면을 쓰고 나도 모르게,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틀을 강요하며 가스 라이팅을 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하는지, 쓰는지, 행동하는지...
자꾸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보고 느꼈던 가스 라이팅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노출시킬 수가 있다. 대물림은 없어야 한다. 이너 피스를 글로 외친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처럼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슬퍼서 혼자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나도 그녀처럼 글로 스스로를 힘 있게 드러내길 소망한다. 나일 때 비로소 완전히 행복하다.
글을 쓰며 느끼는 온전한 자유.
이런 느낌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꿈꾸는 행복한 작가(지망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