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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우유를 좋아해

나의 작은 수호천사

by 사온



잃어버린 아나스타샤 공주를 찾기 위해 전세계가 떠들썩했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이야기. 그 비극은 훗날, 가장 아꼈던 막내 손녀를 찾아 헤메는 러시아의 망명한 황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현대 프랑스 버젼으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프랑스판 아나스타샤 공주와는 지금까지도 각별한 친구로 남아있다. 때는 약 3년 전, 음악가 드뷔시가 태어난 동네인 생-제르-앙-레에 위치한 전원 주택에는 드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별채가 있었다. 그 두 별채 중 하나는 아냐 공주가 살다가 궁궐에 취칙하여 떠나 비어있는 상태였고 -엄밀히 말하자면 공주는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이 되었다- 그 바로 옆의 별채엔 내가 피아노를 들여놓고 살았다.


그 곳에는 집주인 할머니께서 키우던 아주 작은 고양이도 살고 있었다. 성체임에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1키로를 간신히 넘는 아주 작은 고양이는, 귀부인의 손에 길러진 성장배경과는 반대로 그 출신성분이 매우 자유분방했다. 너무 작아서였을까, 가족들로부터 낙오되어 떠돌아다니고 있던 새끼고양이는 프랑스 남부를 여행중이시던 주인 할머니를 만났다.


예쁜 삼색 고양이는 운이 좋았다. 봄이 끝날 무렵 정원과 다름없는 마당에는 장미를 비롯한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었고, 가을이 되면 다람쥐들이 헤이즐넛 나무를 뛰놀았다. 사랑을 듬뿍 받은 "마당 냥이"는 할머니의 병세가 깊어지고 나서부터 그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그녀의 별세 이후 고양이는 재산싸움의 일환이 되었다. 고양이를 빌미로 책임져야할 아냐 공주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라거나, 보호시설에 보내 입양을 시켜야한다거나... 프랑스판 로마노프 황실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결국 그들과는 아무 연 관이 없는 내가, 아냐 공주의 부탁으로 도맡아 키우게 되었다.


건강하게 자란 작은 고양이는 좋은 환경 덕에 장수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무려 열여덟 살이였고, 그 후 나와 함께 1년을 살다가 고양이별로 떠났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나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간식처럼 받아먹던 조에는 우유를 무척 좋아해서, 유제품의 향만 조금이라도 퍼지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야금야금 훔쳐먹곤 했다. 빵은 물론이고, 심지어 초콜릿 포장을 영리하게 벗겨 먹는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집 안의 모든 간식을 틴케이스에 단단히 넣어두곤 했다.


집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생제르망-엉-레에서 이브리쉬어센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 그릇에 고양이 전용 우유 를 따르면, 고양이가 그 냄새를 맡고 곧장 달려왔다. 작고 빨간 혀로 홀짝 홀짝 우유를 핥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 는 것은 꽤 행복했다. 골골송을 부르는 소리는 10년 전, 빵모자를 쓰고 까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을 몽글몽글 피어오르 게 했다.


스물 한살 때 상경을 했다. 처음에는 보증금이 없어 피아노 연습실 근처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여러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다가, 24시간 운영하는 까페에서 야간직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을 했다. 급여가 다른 곳보다 높아서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저녁시간부터 아침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카운터는 너무 좁아서 여직원들만 근무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웠다.


일하면서 듣게되는 여러 가지 헤프닝들이 있었다. 내가 채용되기 몇달 전, 10대 때부터 몇 년간 일해 온 어린 매니저가 돈 통에 손을 대 조금씩 빼내 쓰다가, 그 액수가 어느새 수백만원에 이르렀고, 결국 고소를 당했다는 이야기. 또, 직원 중 한명이 유통 기한이 약간 지난 우유를 버리지않고 고양이에게 몰래 주다가 시에 식품 검수가 들어와 적발당되었고, 그 직원이 벌금을 전부 감당한 끝에 결국 해고당했다는 이야기 등.


당시는 3차 베이비붐 세대의 상경한 청춘들이 일터를 찾고있던 때였고,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지금과 달리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매니져는 면접 때부터 내 첫인상을 맘에 들어했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낀 귀여운 인상의 매니저는, 작은 키와 체구에 비해 다부지고 정이 많았다. 그녀는 내게 일자리를 구하는 이유가 뭐냐 물었다. 나는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사투리 억양이 없는데, 어느 지방에서 왔냐 물었다. 충북이라 대답하자, 그녀는 다람쥐처럼 앞니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본인 역시 충북 사람이라며, 열심히 할 의지가 있어 보인다고 하루이틀 안에 모든 메뉴와 레시피를 몽땅 외워서 곧장 정직원으로 일하 라고 했다.


새벽까지 일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 시간대엔 주로 술에 취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분명 "그란데" 사이즈를 시켰던 것 같은데, 계속 다른 사이즈라고 주장하며 두세 번씩 메뉴를 바꾸던 남자 손님 두명을 상대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새벽 시간은 비교적 한산해서, 그 틈에 까페 뒷뜰의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는 게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실내에만 있 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그래도 조금 쉬는 기분이 들어 피로가 조금은 가셨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잠깐 의자에 앉아서 몰래 쉬기도 했고, 밤이 걷히고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의 옅은 하늘도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히 만들었다.

그 때 수풀 사이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옹"


검은색과 흰색 얼룩무늬 옷을 입은 아기고양이가 나타났다. 밥을 달라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깜찍한 고양이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CCTV에 찍힐지도 모르지만, 나는 몰래 매장 안으로 들어가서 우유를 조금 따라 고양이에게 먹였다.


며칠 동안은 쉬는 시간마다 고양이와 함께했다. 연습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자 팔과 손에 힘이 빠져갔다. 내게 무료로 레슨을 해주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 선생님은, 자주 레슨을 받지 못하는 내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연주에 답답함을 느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빵을 썰다가 그만 빵칼을 다른직원 머리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매대 아래의 재고 보관함에서 물건을 꺼내야 했었는데, 내 아래쪽에서 다른 직원이 상품을 꺼내는 순간, 좁은 공간에서 긴장한 나머지 손에 힘이 풀렸던 것이다.


이런 컨디션 으로는 도저히 버틸수 없고, 만약 이러다가 뜨거운 커피라도 놓치 면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매니저는 본인도 손목 디스크가 있다며, 그런 이유는 의지박약한 핑계일 뿐이라며 그만두지 말라했다.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자그마치 10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은 그런 말 한마디가 따스하게 받아들여지는 정서였다. 그만두지 말라는 그녀는 나의 실수를 덮어주고 싶었던 것이고, 같이 일하고 싶었던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손목디스크라는 말만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이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매니져님,

뒷뜰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사인 같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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