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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그리고 서른의 파리.

부활

by 사온



18:26
저녁 여섯 시 26분
vendredi 27 octobre 2023(UTC+2)
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Heure (Ivry-sur-Seine)
이브리 쉬어 센
트램 역 근처 카페에서 작성



아침부터 책장 정리를 했다. 책장을 들이기까지는 고행이였다. 온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 탓에,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식 아파트의 뒤뜰에 자리한 작은 별채다. 이 별채는 복층 구조로, 피아노 하나가 1층을 거의 다 차지할 정도로 매우 좁다. 하지만 혼자 살기엔 부족함이 없다. 북향인데다가 바로 앞은 아파트가, 사방은 높은 담이 둘러쌓여있는 나의 작은 성에는 늘 선선한 그늘이 덮혀있다. 다락방에 간신히 놓인 침대 매트리스와 책상에는 지붕에 난 작은 창으로 얇은 햇살이 스민다. 이 다락은 나의 침실이자 사무실이고, 작업실이다. 비탈진 낮은 천정의 한쪽 벽에 책들이 가지런히 채워지니 마치 지브리 영화 <마녀배달부 키키>의 우르술라*가 된 기분이 들었다.


*우르슬라: 마녀배달부 키키에 등장하는 젊은 화가. 마을에서 동떨어져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산다.


다락에서 부엌까지 이어지는 작은 사다리를 내려오면 곧장 부엌과 현관이다. 식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인덕션 옆의 틈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다. 아침을 대충 챙겨 먹자마자 집 밖으로 나섰다. <미떵(mi-temps)>, 그러니까 정오 무렵 점심시간에만 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분주히 집에서 오페라 역까지는 약 한 시간. 적어도 오전 10시에는 출발해야 하기에, 그 전의 아침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써야 돌아왔을 때 덜 지친다. 가방에는 한국문화원에서 빌린 한글 책을 챙겨 넣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도보 10분. 간발의 차로 놓치면 10분에서 많게는 20분까지 지각할 수 있다. 지하철에 올랐다.


위기철 작가의 『아홉 살 인생』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는 한국 책은 이상하게도 다른 어떤 책보다 집중이 잘 된다. 아홉 살. 아, 이제는 한국도 만 나이를 쓴다지. 그렇다면 만 일곱살의 무렵, 학교의 맨 윗층에 있었던 학교 도서실까지 올라가는 계단과 학교 복도는 높고 거대했다. 그 층엔 6학년 언니 오빠들이 돌아다녀서다.하지만 아홉살이니까, 책장에 비치된 『아홉 살 인생』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렵사리 대출한 책은 가방에 잘 뒀다가, 피아노 학원 봉고차 안에서 펼쳐들었다.

그리고 지금, 서른 살의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파리의 지하철 안에서 같은 책을 다시 읽는다. 다시 읽는 이야기 속에서 오래전 기억들이 선명히 떠오른다. 잊은 줄 알았던 그 때의 의문점들, 아직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베트콩이 뭐지?"

“애꾸가 뭐야?"

“애꾸새끼는 또 뭐지?

“그리고, 왜 그 아이를 그렇게까지 두들겨 패는 걸까...“


이 어려운 책은 만 일곱살에서 서른 언저리의 시간을 징검다리처럼 이어 강렬한 추억까지 되살린다. 까무잡잡한 피부,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교실 밖 복도에서 외쳤다.


"씨발!"


초등학교 1학년, 입학 후 처음 갖는 쉬는 시간에 들었던 요상하고 생소한 단어였다. 미취학 아동을 갓 벗어난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 반항적인 얼굴에서, 세상의 거칠고 이상한 구석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였다. 내가 아는 기쁨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순간 알아챘다.


쾌락.


카인의 후예인 우리는 그렇게 인간세계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는다. 그 초대는 축복이자 저주다. 예측할 수 없는 규칙으로 작동하는 이 기묘한 세계는 결국 우리를 판도라의 상자 앞에 세운다. 그리고는, 그 열쇠를 찾으라며 우리를 수렁 속으로 밀어넣는다.


『아홉 살 인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저학년을 위한 권장 도서로 이 책을 추천하고 있었다.) 비속어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고급 단어들—이를테면 ‘실존주의 철학’이라든가, ‘토지 소유권’ 같은 개념들은 당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책을 읽고 기억에 남은 건, 친구들끼리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장면 정도가 전부였다.


각종 도식들을 순식간에 논리화하고 암기하며 응용할 수 있는 천재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신학교의 수재들 같은 엘리트라 해도 - 만 일곱 살 아이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 몇십 년 전에 벌어진 일들과 그 안의 애환을, 그것도 글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책에는 사랑 고백을 거절당한 끝에,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골방 철학자도 등장한다.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욕설을 퍼붓고도,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 했던 그는, 그 시절 아홉살 소녀로부터 또다시 외면당했다. 그 소녀는 자살 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철 작가의 간결하고 아기자기한 문장들은 프랑스 문학과 어딘가 닮은 감성을 품고 있다. 어린 마음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뭔가 복잡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문득, 장 자크 쌍페의 『꼬마 니콜라」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홉살의 동심에 카인의 악수를 건넨 작가에게 약간의 노여움이 생겼지만, 이내 회의를 걷어내고 그의 이야기를 활자 한 올 한 올 사랑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밀가루풀의 냄새가 뭉근하게 퍼지는 판잣집, 신문지로 도배한 산꼭대기의 집은 주인공 여민이의 가족이 살던 곳이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뱉어내기에는 너무나 힘겨 워, 달콤하게 그려낼 수밖에 없는 시대의 아픔을 읽는다.


가난한 유학생은 밀린 월세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매일의 고된 하루를 버텨내야만 한다. 이 순간, 오늘 하루가 무너지 지 않기 위해 책 속에 파묻혀 의지한다. 아홉 살 여민이가 사는 달동네 주민들이, 문학 속에 살아남아 활자로 부활하여 죽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내게 쥐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이곳까지 왔다. 산꼭대기 마을의 판자촌, 신문지 벽지들을 떠올리다가 한 정거장을 놓쳐버렸다. "pyramides"역에서 내렸어야 하는데, 어느새 "opera"역까지 와버린 것이다. 계단을 오른다.


책 속, 회색의 작은 집들과 꾀죄죄한 얼굴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아직 햇살이 들지 않은 상상 속 70년대 서울에 잠긴 채로

어두컴컴한 지하철의 출구 계단을 오른다.


신바로크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금빛의 장식과

초록빛의 아치형 지붕의

오페라 가르니에가

두 눈앞에

꿈처럼 두둥실 떠있다.


나는, 파리지앵이다



부활절 기간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이 시기를 Pâques라 부르며 공휴일로 지낸다. 명절처럼 여겨지는 이 시기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풍경이 익숙하다. 나는 주로 여행지 특가를 노려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고 잠시 쉬었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을 때마다 쓰고 그리던 것들을 본다. 그때는 왜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했을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어딘가 비틀어진 구도와 서툰 문장이더라도 몇 해가 지난 뒤 다시 들춰보면 나름대로의 온기가 있다.

재정렬과 새로운 조합,
뒤엉킨 기억들이 부활한다.
이번에는 너무 공을 들이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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