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씨에 불어오는 바람마저 선선한 느낌이네요. 가벼운 걸음으로 지난번 비를 맞으며 피어나던 쉬땅나무 꽃을 보러 갑니다. 아이보리색 같기도 하고 진줏빛 같기도 한 쉬땅나무의 꽃이 한가득 피어있네요. 비가 그쳐 더 우아해진 듯한 고상한 색감과 각자의 방향으로 자유롭게 피어나는 모습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그녀는 한가득 활짝 피어나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누가 꽃봉오리이고 누가 진주일까요? 연달아 피어나는 꽃들은 마치 영롱한 진주가 터지며 꽃으로 피어나는 듯합니다. 활짝 핀 꽃잎 사이에서 길게 솟아 나오는 꽃술에서는 어떤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듯도 합니다.
쉬땅나무의 가는 줄기를 따라 꽃들이 여기저기에서 툭툭 소리를 내며 터지기도 하네요. 어느 가지에는 진주들이 아니 꽃봉오리들이 송이송이 열려있습니다. 어떤 꽃송이들은 구름처럼 밀려오는 듯도 하고 어느 꽃다발은 마치 폭발하는 초신성을 보는 듯합니다. 부풀어가는 꽃봉오리와 피어나는 꽃에서는 즐거운 울림과 함께 화려한 기쁨이 터져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초록의 잎사귀에는 생기가 짙어지고 고상한 색감의 꽃들은 우아한 활기를 느끼게 해 줍니다. 길게 터져 나오는 꽃술들의 힘찬 호흡도 느껴집니다. 비록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말라가며 갈색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꽃들의 웃음은 어딘가에 간직되어 갈 듯합니다.
조금씩 다른 속도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니 산책자에게는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화려한 꽃들의 시간은 짧지만 연달아 피어나는 꽃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책자와 벌들만이 아니고 개미도 그녀를 좋아하는군요. 어느 개미는 꽃 속에 파묻혀있네요. 아니 꿀 속에 빠져있는 걸까요? 작은 부전나비는 개망초 위에 앉아있는데 산책자의 마음은 쉬땅나무 꽃 위에 내려앉네요.
마치 진주가 깨지며 꽃이 되는 듯한 쉬땅나무를 바라보며 오늘 강의에서 들은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다시 들어봅니다.
첫 번째 곡은 ‘기적처럼 아름다운 오월에’입니다. 화사한 햇살이 초원에 가득히 내려앉고 꽃들은 하나둘씩 피어나는 오월에 시인은 사랑에 빠진 듯합니다. 그녀를 향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마음과 점점 커지는 고동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이제 시인의 사랑은 꽃이 되기도 하고 눈물이 되기도 하는군요. 다시 들어볼 노래들을 기억해봅니다. 2. 내 눈물에서 움터 오르리, 3.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 8. 작은 꽃들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13. 꿈속에서 나는 울었네... 그리고 마지막 열여섯 번째 곡은 ‘낡아빠진 나쁜 노래들’입니다. 이제 사랑은 낡았고, 시인은 사랑의 슬픔과 함께 사랑의 기쁨도 땅에 묻기로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갔더라도 사랑의 기억은 남아있겠지요. 비록 새로운 사랑이 다시 시작되더라도요.
노래가 끝나도 피아노의 선율은 길게 이어지는군요. 하인리히 하이네가 펜으로 시를 썼다면 로베르트 슈만은 피아노로 시를 쓴듯합니다. 잠시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삶과 사랑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삶에 성실한 남자 슈만은 라이프치히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결국은 음악에 대한 꿈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는 클라라와의 결혼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비크 교수와 소송도 감수하는군요. 그의 사랑과 열정도 뜨겁네요.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요? 아니면 넘치는 감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우울은 인간의 지능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44세의 그가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라인강에 뛰어들었을 때 그냥 사망한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도 클라라에게도 요. 그런데 그가 46세로 병원에서 사망한 이후에도 클라라는 40년을 더 살아냅니다. '시인의 사랑'의 시인처럼 그녀도 그렇게 살아갔을까요? ‘그녀는 강인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라는 강사의 말에 금방 동의하고 맙니다. 삶이란 정말 꿈같은 것일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트로이메라이'처럼 아름다운 꿈이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