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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꽃의 기억, 한 겨울의 열매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 1

온통 갈색으로 변한 대지에는 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잎새들만이 차가운 느낌의 아침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듯도 하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붉고 진한 열매들이 아직 달려있네요. 문득, 그녀들의 존재에서 강렬한 생명의 느낌이 전해집니다. 모든 것이 깊은 잠에 빠진 듯 쉬어가는 계절인 듯 하지만 곳곳에는 어떤 호흡들이 느껴집니다.

그녀들에게 있어 시간은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환경이 달라질 뿐인 듯합니다. 각자는 각각 적합한 시간 속에서 순환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런데 그녀들을 바라보는 우리만이 시간을 계산하며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산책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는 시간에 따라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난봄과 여름에 화사하게 피었던 꽃들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가는 그녀들을 보며 계절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천천히 걸어봅니다. 한 겨울이지만 날씨는 많이 풀려있고 가볍게 부는 바람마저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드는군요. 이 겨울에 남아있는 열매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지난 시간의 꽃들도 함께 떠올려봅니다. 지금 이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는 열매들은 그 화사한 꽃들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어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비를 견디어낸 결실이네요.

지난봄에 피어나던 매자의 꽃은 정말 우아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신록의 정원에서 노란 꽃을 피우며 산책자의 눈길을 황홀하게 했었지요. 아지랑이가 배어있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살랑이며 산책자의 마음을 설레게도 했었고요. 그랬던 꽃들이 쪼개지듯 떨어지고 열매를 맺더니 오늘 아침에는 붉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쉽게 마르지 않고 빛을 반사하는 붉은 열매는 그 안에 강한 씨앗을 담고 있어서인지 더욱 견고한 느낌입니다.

낙상홍의 둥그스름한 초록의 잎 사이사이로는 말간 꽃이 깨알같이 피어났습니다. 촉촉한 뿌리에서 올라온 수분이 잎맥을 지나며 초록색은 점점 진해지고, 꽃들 사이로 벌들이 날으며 꽃가루를 날리기도 했었지요. 오늘 아침의 낙상홍은 오직 붉은 열매만이 커다란 낙엽 앞에 줄을 지어 달려있습니다. 꽃이 떨어지며 생겨났던 초록의 열매는 이제 크기도 커지고 색깔도 붉게 변하여 이 겨울 속에 남아있습니다.

좀작살나무의 보송보송했던 꽃들도 떠오릅니다. 새순이 돋고 잎이 초록으로 커져가더니 어느 날 문득 그 사이사이에 꽃망울이 맺어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활짝 웃음을 터뜨리며 분홍색 꽃이 피어났었습니다. 꽃술은 길게 뻗어 약간 오만한 듯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도 했고요. 이제 계절의 변화에 따라 분홍색 꽃은 진한 보랏빛 열매로 응고되어 오랫동안 신비한 색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그녀들에게는 그저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기회인 듯도 합니다.

초여름에 피어나던 박주가리의 꽃은 정말 향기가 진했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보리색 또는 분홍빛이 감도는 별 모양의 꽃에서 날리는 향기는 벌과 나비들만이 아니고 산책자마저 어찔어찔하게 했었지요. 꽃이 떨어지며 조그 많게 열매가 돋아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빗던 그 열매는 이제 자라고 자라서 홀씨를 날리고 있습니다. 피부는 완전히 거칠어져 돌덩이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 견고한 껍질이 벌어지며 솜털이 보송한 씨앗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봄날에 연한 붉은빛의 꽃봉오리가 터지며 아이보리의 우아한 색감으로 피어나던 꽃사과 꽃이 생각납니다. 하늘에서 흔들거리던 꽃사과의 꽃은 산들바람에 마알간 향기가 날리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