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히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겨울 열매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마른 가지만 남아있는 정원은 약간 쓸쓸해 보입니다. 지난여름의 신록과 가을에 단풍이 가득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황량하지만은 않군요. 자세히 보니 이 한 겨울에도 생명들은 어떤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지난봄의 화사했던 꽃들이 가을에는 새로운 생명을 간직한 열매가 되더니 아직도 굳건하게 달려있습니다. 빨리 땅으로 돌아가는 게 순리겠지만 그녀들의 여유에 산책자는 그저 즐거운 마음입니다.     

매자나무의 마른 가지 끝에서 두 개의 열매가 붉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왠지 그녀들로 인해 주변까지 환해지는 듯하네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더욱 단단해진 듯합니다. 곱던 피부는 약간 거칠어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숨길 수는 없네요. 셋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한 겨울의 그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뒤쪽에 있는 아이에게 같이 놀자고 손짓도 하는 걸까요?     

좀작살나무의 긴 줄기는 검게 말라버린 열매들이 달려있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보라색을 간직하고 있는 열매도 보이네요. 길게 늘어진 가지에서 겨울바람과 함께 그녀들의 어떤 노래가 들려오는 듯도 합니다. 갈색으로 변해버린 정원의 한편에는 마른 줄기에 달려있는 마른 잎과 변해버린 열매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몇 개의 보라색 열매들이 아직 신비한 색감을 보여주며 어떤 에너지를 느끼게도 합니다.     

이쪽의 낙상홍은 열매가 거의 다 떨어졌네요. 아주 작은 몇 개의 열매들만이 이곳저곳에 달려있군요. 이리저리 엉켜있는 가지들 사이에 붉은 점이 찍혀있는 듯도 하고요. 그런데 약간 말라있지만 여전히 우아함은 잃지 않고 있네요. 붉은색의 열매 안에는 또 어떤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박주가리는 여전히 홀씨를 날리고 있습니다. 이제 한 해의 결실을 맺으면서 시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을 듯합니다. 조팝나무의 마른 가지를 휘돌아 감고 있는 박주가리의 줄기에서는 갈색의 열매들이 벌어지며 다들 씨앗을 날리려 하는군요. 커다란 열매도 작은 열매도 모두들 그렇네요.        

산수유의 열매는 많이 쭈글쭈글해졌지만 색감은 여전히 곱습니다.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곱게곱게 말라가는 듯합니다. 안으로는 에너지를 농축하면서요. 벌써 검게 변해버린 열매도 있군요. 하지만 가지의 끝에는 뭔가 에너지가 차있는 듯한 봉오리가 보입니다. 벌써 내년 봄의 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화살나무를 휘돌아 감아가며 피어있던 나팔꽃의 씨방도 터지려 합니다. 단단한 듯한 껍질이 깨어지고 있고 그 아래에는 솜털이 가득한 꽃받침의 흔적이 남아있군요. 이제 내년 봄에는 다시 나팔꽃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화살나무에는 아직 열매가 달려있습니다. 붉게 터져 나온  씨앗에는 에너지가 가득해 보입니다. 이제 땅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시간을 준비하겠지요.       

  

겨울은 많은 것들이 쉬어가는 계절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이면에서는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고 있네요. 그리고 겨울에도 쉬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생명들도 많고요. 다년생 식물들은 물론이고 일 년생 식물들도 씨앗을 날려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네요. 멀리 날아간 씨앗들은 새싹을 돋우면서 겨울 동안 안에서 준비했던 생명을 약동시키게 될 듯합니다. 그리고 겨우내 꽃봉오리에 에너지를 간직하던 또 다른 그녀들은 이제 봄이 되면 꽃부터 피우게 되겠지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을 그리워하며 일손을 놓아버렸다는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은 재미있습니다. 이제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꽃들이 피고 나의 정원에도 생명의 호흡이 가득하겠지요. 그런데 페르세포네는 겨울 동안 지하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어쩌면 그녀도 호흡하며 식물들의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했던 것은 아닐까요? 문득, 차가운 대리석에서조차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했던 베르니니의 페르세포네의 납치가 생각납니다.      

날씨가 추운 계절이지만 따뜻한 온기를 좀 더 나누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온기는 나누면 나눌수록 주변은 더 따뜻해질지도 모르겠네요. 뜨거운 커피 한 잔이 몸을 훈훈하게 하고 음악 한 곡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을 들어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날, 집안에 둘러앉아 따뜻하게 불을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