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아침, 붉은 매자들의 연주는
한 겨울인데 비가 옵니다. 날씨가 따뜻하다는 말이겠지요. 이슬비가 내리는 겨울 풍경을 보니 뭔가 기분이 침착해집니다. 비를 맞고 있는 겨울을 조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우산을 쓰고 나서봅니다.
하늘은 잔뜩 회색으로 가득하고 이제 다 말라버린 듯한 먼 산에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산책길의 나무들도 비에 젖어가고 있고요. 이제 빗물에 조금 생기가 돌게 될까요? 딱딱해진 겹벚꽃나무의 껍질 위에 돋아있는 연둣빛의 이끼는 뭔가 생생한 듯도 합니다.
붉은 매자 열매들도 이슬비를 함빡 맞고 있네요. 올봄의 새순과 꽃 그리고 열매까지 그 변화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마른 가지에도 빗물이 스며드는 듯한데 가시는 여전히 단단해 보이는군요.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붉게 익어온 그녀는 이제 비를 맞고 있네요. 시간에 따라 견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안으로는 어떤 정열을 가득 담고 있는 듯합니다. 가지 끝의 붉은 잎사귀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바람에 조금 떨고 있는데 붉은 열매들은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산책자의 마음은 그저 즐거울 뿐입니다.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가 봅니다. 탐스러운 붉은 볼은 차가운 물에 세수를 했는지 더욱 마알간 모습입니다. 아래쪽에 달려있는 물방울은 왠지 자연의 보석으로 만든 목걸이 같기도 하네요. 붉은 잎 아래의 붉은 두 열매는 약간 떨어져서 걷고 있는 듯하네요. 왠지 젠틀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뭔가 사귀기 시작하는 커플을 보는 듯도 하고요. 어느 커플은 사랑에 빠진 듯합니다. 아, 정말 다정한 모습입니다. 한 개의 물방울을 같이 담고 있는 이 모습은 따뜻한 포옹 같기도 하고 붉은 입맞춤 같기도 하네요. 완숙한 애정이란 이런 것일까요?
지난번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가지에는 이제 둘만이 남아있네요. 오른쪽의 열매는 많이 검붉어져 있군요. 약간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뭔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중년의 시간 속에 담긴 애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물방울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거꾸로 담겨있군요.
아직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들에서는 뭔가 명랑한 울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들 촉촉하게 젖어있고 맑은
물방울들을 달고 있기도 합니다. 긴 가지에 달려있는 열매들을 보니 왠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왼쪽은 바이올린 파트이겠지요. 제1, 2 바이올린이 있고 그 옆에는 비올라 파트도 있는 듯하고요. 다들 힘차게 활을 켜며 현의 앙상블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왼쪽의 멜로디 만이 아니고 오른쪽의 리듬도 느껴집니다. 묵직한 느낌으로 보아 첼로와 더블베이스일까요? 붉은 열매와 산뜻한 물방울들이 산뜻한 화음을 만드는 듯합니다. 그녀들의 화려한 연주에 제 마음마저 밝아지며 즐거워집니다.
커다란 빗방울을 달고 있는 그녀는 아마 피아니스트인 듯합니다. 격렬한 연주 후에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는 듯합니다. 지금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물방울은요? 아, 금방 떨어졌습니다. 뒤쪽은 왠지 목관 파트인 듯합니다.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그리고 바순의 음들이 잔잔하게 울리는 듯하네요. 그렇다면 그 뒤쪽은 금관 파트이겠네요. 왠지 호른, 트럼펫, 트롬본 그리고 튜바의 강하고 경쾌한 울림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빗방울을 담고 약간 흔들리는 붉은 열매들에게서 뭔가 오케스트라의 장쾌한 느낌도 듭니다. 그녀들은 리드미컬하게 비를 맞고 물방울을 맺었다가 또 떨어트리며 어떤 자연의 멜로디를 들려주는 듯하네요.
붉은 매자 열매들과 빗방울이 들려주는 자연의 음악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빗방울은 점점 가늘어지지만 붉은 열매들의 연주는 계속될 듯합니다.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연주로 들어봅니다. 날씨도 시원하고 음악도 시원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