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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하얀 눈 속의 열매들과 음악 한곡

창밖이 온통 하얀 세상입니다. 창문을 여니 알싸한 찬바람이 들어오며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밤새 내린 눈에 하얗게 변한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니 뜨거운 커피가 더욱 맛있습니다. 따뜻한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눈 속의 열매들이 생각나서 길을 나서봅니다.     


하늘은 맑고 파란데 멀리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옵니다. 생각보다 날씨는 춥지 않고 하얗게 쌓인 눈은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벌써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놀기도 하고 눈사람과 눈오리를 만들기도 하네요.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이곳에는 매자의 빨간 열매들이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녀들도 어제 내린 흰 눈을 맞으니 즐거웠나 봅니다. 지난가을에 비해 살짝 주름이 졌지만 색깔은 더욱 진해졌습니다. 눈을 온통 뒤집어쓴 그녀들은 춥지 않은 것일까요? 그런데 쌓인 눈은 그녀들의 뜨거운 정열에 저절로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가지에 달린 열매들은 흰 눈에 상기된 듯 더욱 빨갛고 말끔합니다. 살짝 신이 난 듯 경쾌한 그녀들의 모습은 한 겨울의 멋진 멜로디를 담고 있는 악보 같기도 합니다. 머리에 눈을 이고 그녀들은 사뿐사뿐 걸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요? 그녀들도 눈이 쌓인 이 겨울의 풍경을 보고 싶은 것일까요?      


흰 눈을 담고 있는 낙상홍의 열매는 더욱 빨갛게 느껴집니다. 시간을 담고 있는 잔주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진한 빨간 색깔의 둥근 열매들은 산뜻한 느낌입니다. 가는 가지에 둥근 열매들이 아직 주렁주렁하네요. 눈이 내리는 이 겨울까지 깊어지는 붉은색을 보여주며 씩씩하게 달려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그녀들에게서는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달린 열매들의 춤사위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녀들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춤이 되고 노래가 되는군요.      


     

쌓인 눈을 조심스레 밟으며 천천히 걸어봅니다. 남천의 빨간 열매들은 자신들의 몸집보다 훨씬 많은 눈을 쓰고 있네요. 눈 속에 푹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붉은 열기는 쌓인 눈을 녹여내는군요. 마치 눈이 쌓인 계곡 사이에서 빨간 열매와 초록 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생각보다 힘이 세네요. 눈이 내리는 이 계절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내봅니다.      


아침 햇살이 점점 다가오며 세상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쌓인 눈은 조금씩 꿈틀대고 녹아내리는 맑은 물방울은 햇빛에 반짝이는 투명한 겨울 아침입니다. 마른 가지에 송알송알 달려있는 좀작살나무의 보랏빛 열매들이 고즈넉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햇빛은 쌓인 눈 위에서 반짝이기도 하고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는데, 길게 늘어진 가지의 열매에서는 조용한 겨울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저 깊은 보라색에 담겨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지난 계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일까요?       



붉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야광나무에서 어떤 아우성이 느껴집니다. 그녀들이 내는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흰 눈을 맞으니 신이 나는 것일까요? 이제는 탄력 있는 피부 대신 진한 붉은 색감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들도 머리에 흰 눈을 쓰고 있습니다. 눈으로 된 멋진 왕관 같기도 합니다.      


누구는 새와 함께 멀리 가버리고 그녀만이 홀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있네요. 그런데 하얀 눈 속에 한 알의 빨간 보석이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락이 아니고 땅으로의 회귀인 듯합니다.      


한 겨울의 열매들은 비록 주름이 지며 말라가지만 조금 더 멀리 가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이기도 합니다. 뭔가 강인한 생명의 힘이 느껴지기도 하는군요. 눈 속의 그녀들을 바라보는 산책자의 마음도 푸근하기만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니까요.      


그녀들과 함께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2악장을 요요마의 첼로와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뉴욕필의 연주로 들어봅니다. 뭔가 모를 그리움이 떠오르고 지금의 이런저런 생각은 아련하게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냥 느낌 그 자체일까요? 그런데 눈 속의 그녀들도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드는 이 멜로디를 조용히 듣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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