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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어느 날 아침의 '가을의 기도'

창문을 여니 제법 쌀쌀한 아침 공기가 온몸에 느껴집니다. 뜨거운 커피를 내리며 바라본 창밖에는 늦가을의 풍경이 완연합니다.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어가던 나뭇잎들은 벌써 낙엽이 되어가고 나뭇가지에는 붉은 열매들만이 뜨거운 생명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그녀들도 하나 둘 땅으로 돌아가며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겠지요.      


문득 떠오르는 김현승 님의 '가을의 기도'의 첫 구절을 읽어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낙엽이 가득한 어느 가을날에 시간을 느끼고, 시어를 고르며 마음을 써 내려가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시인의 겸허한 모국어를 되뇌며 이 늦가을 속으로 나서봅니다.     


낮은 가지에 달려있는 미국 낙상홍의 붉은 열매를 내려다봅니다. 몇 잎 남지 않은 잎사귀에는 검은 반점이 커져가지만 빨간 열매는 이제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듯하네요. 아직 탄력 있는 붉은 열매에는 어떤 생명력이 가득 담겨있는 듯합니다. 메마른 땅에는 낙엽들이 가득하고 붉은 열매들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지에 남아있는 붉은 열매들이 충만한 계절을 느끼게 해 줍니다.       


나뭇가지와 땅 사이는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노란 잎과 붉은 열매들이 멋진 풍경이 됩니다. 언젠가는 그녀들도 땅으로 돌아가겠지만 산책자는 가능한 오래 보고 싶다는 욕심을 나지막이 말해봅니다. 아직 튼튼하게 달려있는 붉은 매자나무의 잎들이 반갑습니다. 엊그제 비가 온 때문인지 더욱 깨끗한 모습입니다. 


 

비록 잎은 다 떨어졌지만 마른 가지 위에는 붉은 열매들이 단단하게 익어있습니다. 그런데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은 아주 잘 익어가기도 하고, 벌써 검붉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상처를 간직하고 익어가기도 하는군요. 맑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알싸한 바람에 잎도 열매도 더욱 붉어지는 듯도 합니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을의 기도'의 두 번째 구절도 읊조려봅니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시인이 선택할 오직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무엇일까요? 막스 브루흐의 '로맨스'를 재닌 얀센의 연주로 들어봅니다. 비올라의 그윽한 선율이 바람과 함께 산책자의 마음에도 스며드는 듯합니다.     


길게 뻗어나간 가지에는 낙상홍의 붉은 열매들이 가득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반짝이며 미소 짓는 그녀들이 깊어가는 가을날을 더욱 느끼게 해 줍니다. 그녀들의 화려한 춤사위도 느껴봅니다. 바위 앞으로 뻗어 나온 가는 가지에도 낙상홍의 열매들은 붉기만 합니다.      


이제 좀작살나무에도 열매만이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주름이 지고 있고 어떤 열매는 검게 변해버리기도 했군요. 새삼 빠른 시간의 흐름을 느껴봅니다. 잎이 다 떨어진 마른 가지마다 보랏빛 열매들이 주렁주렁합니다. 점점 말라 가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타깝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녀들은 이제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담으며 키워왔던 씨앗들은 새로운 계절에는 새로운 싹으로 돋아나겠지요.


화살나무의 열매들은 이제 거의 다 익었나 봅니다. 겉껍질이 터지며 붉은 씨앗이 온통 드러나 있습니다. 봄이 꽃이라면 가을은 열매라고 생각했는데 가을에도 꽃일까요? 잘 익은 열매들이 마치 활짝 핀 꽃 같습니다.    


벼랑에서 익어가던 배풍등도 더욱 붉어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초록의 열매도 보이는군요. 한 가족인 듯한 크고 작은 열매들에서는 맑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잎 사이로 아주 잘 익은 열매가 보입니다. 이제 절정의 색감을 보여주는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네요.      



계절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낙엽과 함께 잘 익은 열매들도 떨어져 갑니다. 어쩌면 잎도 열매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이겠지요. 이제 그녀들은 새로운 계절이 되면 새싹을 돋우고, 꽃이 피어 다시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들이 떠나는 것에 그리 슬퍼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우리네 삶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일 듯도 하니까요.     


'가을의 기도'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해봅니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누구나 그랬을 것처럼 시인도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왔네요. 그리고 이제 마른 나뭇가지에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맑은 영혼이 느껴집니다. 그는 홀로 있지만 온전한 자신의 영혼 속에서 충만한 삶의 기쁨과 의미를 느끼셨을 듯도 합니다.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3악장을 조슈아 벨의 바이올린 연주로 들어봅니다. 그런데 약간의 차가움을 간직한 늦가을의 바람은 붉은 열매들이 가득한 낙상홍의 가지를 흔들며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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