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열매들은 각각의 모습으로 익어가고
구름 한 점 없는 먼 하늘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는 맑은 바람에는 연한 파란 색깔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그 맑은 하늘의 입김에 길가에 가득한 낙엽들이 춤을 추듯 밀려갑니다. 이제 완연히 늦은 가을입니다. 이곳저곳에 울긋불긋한 잎들이 깊어가는 계절을 느끼게 합니다.
낙상홍의 노란 잎은 빛나고 단풍나무 잎은 빨갛게 불타오릅니다. 약간의 초록빛이 남아있는 화살나무의 잎은 점점 붉어지며 여러 가지 색깔을 한꺼번에 보여주는군요. 가을은 이렇게 나뭇잎과 함께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어가나 봅니다. 오늘도 안단테로 느리게 걸으며 색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에 빠져보기로 합니다.
자연스럽게 눈길을 끄는 빨간 열매들을 따라 또다시 계절을 느껴봅니다. 빨간 낙상홍은 늦은 가을임을 일깨워주네요. 어느 낙상홍은 날개를 펄럭이는 노랑나비 같기도 하고 노란 리본을 맨 가을 여인을 보든 듯도 합니다. 노란 잎과 빨간 열매가 그윽한 풍경이 되는군요. 그 모습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기억에 담아봅니다. 이 가을은 정말 진한 노란색과 빨간색이네요.
스스로 반짝이는 빨간 열매를 보니 다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가을은 생각보다 뜨거운 계절이네요. 노란 잎이 갈색으로 변해가는데 그 사이의 열매는 빨갛게 익어있습니다. 마치 알록달록한 호랑나비를 보는 듯합니다. 그녀들이 보여주는 가을의 풍경을 편안한 마음으로 느껴보게 됩니다.
커다란 화살나무의 잎들도 붉게 물들어갑니다. 초록이 붉어지기도 하고 노랗게 변하다가 붉게 물들어가기도 하는군요. 여러 색깔의 잎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또 다른 가을의 노래를 부르는 듯합니다. 진한 핑크빛의 잎 사이에서 잘 익은 열매의 겉껍질이 터지고 있네요. 진한 주홍의 속살이 요염한 느낌마저 듭니다.
키가 큰 미국 낙상홍의 잎도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노란 잎 사이마다 빨간 열매가 익어있는데 햇빛을 받으니 더욱 반짝이는군요. 잘 익은 열매는 그늘 쪽에서도 빛이 납니다. 탐스럽기도 하고 잘 익은 가을을 보는 듯합니다.
빨갛게 익은 남천의 열매도 눈에 들어옵니다. 잘 익은 열매들이 진한 잎새 사이에서 주렁주렁 열려있는데 갸름한 모양의 잎들도 많이 붉어졌습니다. 지난봄의 하얀 꽃과 노란 꽃술이 이제 진한 빨강의 열매가 되어 빛나는군요. 벌써 검붉어진 열매들은 붉게 물든 잎새 위에서 반짝입니다. 그런데 뭔가 바삭바삭한 설탕과자가 생각납니다.
키가 아주 큰 야광나무에도 빨갛게 익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잎이 떨어지니 더 많은 열매가 보이네요. 늘어진 가지에 달려있는 열매를 가까이 바라봅니다. 정말 곱게 익었습니다. 여러 색깔로 물들어가는 가을날에 붉은 야광나무 열매가 하늘거립니다. 하늘은 뿌옇고 햇살은 멀리 있는데 나뭇가지에는 깊어가는 가을의 붉은 그리움이 달려있는 듯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야광나무를 보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습니다. 바리톤의 멋진 목소리로 '뜸북, 뜸북, 뜸북새'를 부르는 얼굴에는 즐거움이 담겨있네요. 왠지 저도 따라 부르게 됩니다. 멀어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오빠 생각'을 어느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로 들어봅니다. 그런데 뭔가 마음이 서늘해져 옵니다.
고개를 들어 먼 가을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은 뭔가 뿌연 느낌이 드는데 햇살만은 따뜻하게 내려와 잘 익은 열매들을 어루만지네요. 그런데 늦가을의 나지막한 호흡 같은 부드러운 바람은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춤추게 하는군요.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에서 흩어지며 그림자를 만들고 길가에는 낙엽이 쌓여갑니다. 바람을 타고 잠시 춤을 추던 단풍잎 하나가 산책자의 어깨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왜 가을이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땅에서도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는데 오래된 이야기와 함께 희미한 미소들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지난 이야기는 생각보다 선명합니다. 마치 엊그제의 일들 같기도 합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오래된 노래 제비를 들어봅니다. 모처럼 듣는 노래도 좋고 홍성모의 묵직한 목소리는 늦가을에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니 붉은 열매들만 반짝이고 있네요. 어쩌면 가을이면 기억 속의 이야기도 익어서 붉은 열매들처럼 스스로 빛이 나는 것일까요? 가을이면 익어가는 것이 열매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웬일인지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도 듣고 싶어 집니다. 소프라노 신영옥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산책자의 마음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