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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배풍등, 그녀들의 겨울 이야기는

한 겨울의 휴일 오후는 한가롭습니다. 생각보다 날씨는 포근한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은 어쩔 수 없는 겨울 풍경이 되네요. 며칠 동안 눈도 비도 내리지 않아서인지 가지마다 뿌연 먼지도 쌓여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영산홍이 자라고 있는 언덕에서는 붉은 열매들이 반짝이고 있네요. 갈색의 풍경에 붉은 열매들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군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합니다.      

비록 주름져가지만 아직 남아서 붉은 색감을 보여주는 배풍등의 열매들이 반갑습니다. 왠지 홍등이 아직 꺼지지 않은 듯하네요.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저기 모여있는 열매들이 마치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길게 늘어진 줄기 아래에 열린 그녀들이 밝게 웃는 듯합니다. 생글거리는 앞쪽의 그녀가 더 크지만 탄력을 보니 동생인 듯하네요. 벼랑의 위쪽에서 사뿐사뿐 걸어 내려오는 듯한 그녀들의 가벼운 몸짓이 느껴집니다. 뭔가 약간 신이 난 듯도 하네요. 혹시 산책자를 반겨주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보니 그녀들의 가족은 꽤 많군요. 말라가는 줄기를 따라 걸어 나오며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젊은 그녀들은 아직 초록빛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탄력도 여전하고요. 더 추워지기 전에 좀 더 힘을 내보라고 응원을 해봅니다. 그런데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도 화려하네요. 그녀들은 곱게 나이 들어 가나 봅니다. 주름 하나하나에는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고요.     


벼랑을 조심스럽게 올라 위에서 바라보기로 합니다. 그녀들은 뒷모습도 아름답네요. 어떤 시간이 꽉 차있는 듯도 합니다. 언덕 위의 평지에 서서 그녀들을 바라보니 하얀 꽃이 피고 작은 초록의 열매를 맺어가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문득 그녀들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가 떠오릅니다. 그녀들의 눈에는 '어떤?' 하는 호기심이 가득 배어납니다. '브라더스 포의 Try to remember가 어때요?'라고 묻자 그녀들도 좋다고 하네요. 멋진 멜로디와 함께 가사 안에 담겨있는 의미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위에서 보니 아직 초록을 간직하고 있는 영산홍의 잎새들 사이사이에 붉은 열매들이 꽤 남아있군요. 자유롭게 뻗어나간 배풍등의 줄기를 따라 그녀들의 붉은 모습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탄력은 이제 주름이 되었지만 붉은 색감을 간직한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영산홍의 잎 사이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사이좋은 자매들이 수줍은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녀들은 무슨 재미난 이야기가 그리 많은 것일까요? 꽃 피던 시절에 찾아왔던 나비와 벌 이야기라도 하는 중일까요?        


다정한 모습은 그녀들 만이 아니었네요. 손을 잡고 걸어가는 듯한 초록과 주황은 어떤 커플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군요. 얼굴을 마주 대고 있는 갈색과 주황의 커플은 나이가 조금 있으신 듯합니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한 듯 애정이 가득한 모습이네요.       



사철나무의 초록 잎 사이에서 살고 있는 어느 가족도 만납니다. 어쩌면 그들은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지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대가족의 모임도 만납니다. 뭔가 잔치라도 벌이고 있었던 것인지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네요. 레드 와인을 한잔하신 분도 계시고, 모여서 게임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도 보이는군요.       


자신의 마른 잎 아래에서 세 자매는 뭔가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는 듯합니다. 자글자글한 주름에는 뭔가 중년의 기쁨과 의미도 담겨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한 해를, 아니 일생을 잘 지내온 소회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거의 말라버린 그녀들에게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꽤 많은 시간을 담고 있는 그녀들에게서는 안타까움보다는 어떤 숭고한 느낌마저 드는군요. 그녀들의 깊은 주름 속에는 잘 익은 생명의 씨앗이 담겨있을 테니까요.      


한 겨울에도 꿋꿋하게 남아있는 열매들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제 내년에는 새순과 함께 그녀들의 작고 앙증맞은 하얀 꽃을 다시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다시 초록의 열매로 커가고 붉게 익어가는 모습도 보게 될듯합니다. 어쩌면 그녀들의 딸일지도 모르지만요.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녀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마음마저 흐뭇해집니다. 어쩌면 이곳에 살고 있는 그녀들에게는 여기가 고향이겠지요. 고향 마을에 모여서 정답게 살고 있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온 듯합니다.     


비록 이제는 오래된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고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고향일 수도 있겠네요. 토니 베넷의 '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듣고 싶어 집니다. 또다시 가사의 뜻을 음미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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