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기억, 한 겨울의 열매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 2

오늘은 꽤 많이 걷게 됩니다. 커피를 많이 담아오길 잘한 듯합니다. 내친김에 좀 더 시간을 따라 산책을 해보기로 합니다.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매력을 뽐내던 그녀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으니까요.      

올해 처음 본 화살나무의 꽃은 예쁘기도 하지만 모양도 독특한 느낌입니다. 동그란 꽃봉오리가 점점 벙글어지더니 노랑에 가까운 연둣빛의 네 장의 꽃잎으로 활짝 피어나더군요. 그 안에서는 조그만 돌기들이 점점 커지며 씨방으로 커지기도 했고요. 잎도 꽃도 다 떨어지고 화살 모양의 결이 있는 가지는 단단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가지 사이사이에는 아직도 붉은 속살을 보여주는 씨앗이 달려있군요. 그녀를 보호하던 겉껍질이 깨어지며 붉은색으로 여전히 새들을 유혹하는 듯도 합니다.      

화사한 햇살 아래 뽀얗게 피어나던 남천의 꽃은 아스라한 추억의 색깔과 비슷합니다. 하얀 꽃이 벌어지고 노란 꽃술을 보여주며 안에서 연한 노랑의 씨방이 커져가던 모습은 어쩐 전설 같기도 하네요. 오늘 아침 햇살을 받는 남천의 붉은 열매는 그저 달콤한 느낌입니다. 보아도 보아도 왠지 설탕과자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군요. 만지면 왠지 바삭하며 부스러져버릴 듯도 하네요.      

지난봄에 가장 부지런했던 산수유의 꽃은 가장 여유 있는 열매들 사이에서 피었습니다. 새봄이 시작되기를 기다린 듯 약간 촉촉한 날씨 속에서 꽃봉오리가 맺는가 싶더니 어느 날 활짝 피어났었죠. 그런데 오늘 아침의 마른듯한 열매 사이에서 또 어떤 봉오리가 단단하게 커져갑니다. 그녀는 이 겨울에도 쉬지 않고 저 봉오리 안에서 에너지를 모으며 또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올여름의 어느 날 산책길에 문득 눈에 들어왔던 구기자 꽃도 떠올려봅니다. 활짝 핀 보라색 꽃이 정말 산뜻했었지요. 안으로는 길게 뻗은 꽃술을 담고 바깥쪽으로는 보라색의 맥이 퍼져나가던 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문득 눈에 들어오는 구기자의 열매입니다. 지난가을에는 빨간 열매를 자랑했었는데 이 겨울에는 주황의 열매가 남아있군요. 반가운 모습에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습니다.     

신록의 나뭇가지 사이에 온통 피어있던 산사나무의 꽃은 또 다른 매력이 가득합니다. 조금 둥근 꽃잎이 왕성한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듯한 꽃술과 함께 고상한 색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꽃의 기억을 담은 초록의 열매는 조금씩 커갔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니 가지마다 붉은 열매들이 가득 달려있었습니다. 알알이 영글어가는 가을의 즐거운 울림이 느껴지더군요.   

    

이 겨울에는 주근깨 가득한 붉은 색감을 보여주네요. 하지만 아직은 탄력이 남아있습니다.  그녀들이 있어 가을에서 이어지는 이 겨울에도 마음이 더 따뜻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내년 봄에 새순이 돋을 때까지도 남아있겠지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식물들에게는 그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순환하는 과정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느끼는 산책자에게는 이 모든 게 신기할 뿐이네요. 이제 연말이지만 산책자 역시 그리 바쁠 것은 없습니다. 올 한 해 그녀들과 함께하며 자연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까요. 굳이 말해보라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보라'라고 해볼까요?      

앞으로도 그녀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듣는 시간은 계속될 듯합니다. 그런데 오늘 듣는 하이든의 교향곡 101번 시계의 2악장이 더욱 상쾌한 느낌이네요. 앞으로의 시간도 하이든의 교향곡처럼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흘러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