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열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
겨울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멀리서 바람은 앙상한 가지에 노래로 다가옵니다. 투명한 아침 햇살은 나무의 그늘을 만들며 가까워지는군요. 차가운 바람은 날카롭고 손은 굳어오지만 심호흡을 해보니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어느 해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다가와 점점 멀어지나 봅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아직 한 해는 다 가지 않았고 아쉬운 마음은 남아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을 따라 천천히 걸어봅니다.
많은 시간을 담고 있는 낙상홍 열매는 정말 진한 빨간색입니다. 비록 주름이 깊어지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단단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왠지 그 따뜻함이 산책자에게도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아직 노란색 감이 남아있기도 하고 약간의 주름과 검은 반점에도 여전히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붉은 열매도, 상처를 받은 열매도, 검붉어진 열매도 편안하게 산들거립니다. 찬 바람이 불어도 그녀들의 겨울 노래는 따뜻한 느낌입니다.
갸름한 모습의 매자 열매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마른 가지의 가시는 굳세지만 붉은 열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이네요. 주름이 져가며 갈색으로 말라 가기도 하지만 아직 진한 붉은색을 간직하고 있기도 합니다. 뾰족한 가시가 돋아있는 마른 가지에 늘어선 여러 모양과 색깔의 열매에서는 어떤 생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양지쪽의 좀작살나무 열매는 하얗게 변하기도 하고 아직 진한 보라색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햇살의 뒤쪽에서 바라본 그녀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군요. 아니, 이제 보라색 향기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그녀 자신이 햇빛이 되는 듯도 합니다. 바짝 마른 가지에 지금까지 달려있는 작은 열매들의 낮은 호흡을 느껴봅니다.
한 겨울이지만 남천의 잎과 열매는 씩씩한 느낌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내는 듯도 합니다. 어느 열매는 검붉어지기도 하고 진한 빨간색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진하게 반짝이는 모습에서는 뭔가 단단한 느낌도 드는군요. 약간의 상처가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붉은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붉은 열매들이 있어 겨울이 더욱 빛나는 듯합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야광나무 열매들이 밝은 햇살을 받고 있네요. 자유로운 그녀들의 출렁임을 느껴봅니다. 붉은색은 퇴색하고 깊은 주름을 새기며 말라 가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네요. 그늘에서도 고즈넉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언젠가는 꼭지만 남은 뒤쪽의 열매처럼 새를 따라 멀리 날아가겠지요.
겨울바람은 붉은 열매만이 아니고 산책자의 얼굴에도 차갑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런 차가움을 느껴볼 수 있는 것도 겨울의 매력일 듯합니다. 두꺼운 외투를 여미며 마음 안에는 한 해의 여러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비록 한 해가 가더라도 많이 아쉽지는 않네요. 언젠가는 이 해의 이야기들을 꺼내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따끈한 커피잔을 어루만지며 음악을 들어봅니다. 재닌 얀센의 바이올린과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의 연주로 듣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오늘따라 겨울이 느껴집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바이올린 현의 움직임에는 서릿발 같은 겨울바람의 날카로움도 있고, 쌓인 눈을 녹이고 있는 밝은 햇살의 따스함도 담겨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연주에서 차갑고도 따뜻하고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달콤함이 느껴집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새삼 겨울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