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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봄비 같은 겨울비 그리고 꽃 같은 열매들

비가 내립니다. 왠지 봄비가 내리는 듯합니다. 오늘도 날씨가 포근하니 겨울비 같지 않군요. 금방이라도 봄이 올 듯도 하네요.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우산을 쓰고 나서봅니다. 한자로 표현하자면 우중산책(雨中散策) 이랄까요? 문득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조금 성급한가요? 촉촉이 젖어가는 대지의 어디에선 가는 빨간 열매들이 생기를 더하고 있을 듯합니다. 비를 맞고 있을 열매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비에 젖은 낙상홍의 붉은 열매가 마치 꽃 같습니다. 그동안 햇빛도 받고 눈도 맞더니 이제는 비를 맞고 있습니다. 빗물을 함빡 담고 있는 모습에서는 어떤 생기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어느 열매는 커다란 빗방울을 달고 있기도 합니다. 물방울 안에는 또 한 세계가 담겨있네요. 빗방울을 담고 있는 붉은 열매들은 어떤 맑은 음악소리가 들려옵니다.       


진한 보라색 열매와 탄화된 듯한 검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좀작살나무 가지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졌습니다. 빗물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듯하네요.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유연한 몸놀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안개 같은 이슬비 속의 좀작살나무 열매는 신비한 느낌입니다. 습기에 촉촉해진 보랏빛 향기가 퍼져 나오고 있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에 촉촉하게 젖어가며 비 오는 어느 겨울날의 노래를 부르는 듯합니다. 어떤 변화의 과정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노래에는 어떤 시간도 담겨있는 듯도 하고요. 조금 하얗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아직 보라색을 간직한 열매들의 힘찬 호흡도 느껴집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마치 안개 같습니다. 우산을 던져버리고 잠시 습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산책자에게도 생기가 돌게 될까요? 이제 산수유의 붉은 열매도 많이 떨어졌네요. 긴 가지에 달려 이슬비를 맞고 있는 열매가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땅에는 이슬비에 젖은 초록의 이끼들이 촉촉합니다. 그런데 그 위에 누워있는 산수유의 열매들이 왠지 편안해 보입니다.       


벼랑 위의 배풍등 열매들은 비를 많이 맞지 않은 듯합니다. 어쩌면 빗물은 뜨거운 그녀들의 정열에 벌써 다 증발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빗물이 촉촉한 영산홍의 잎 사이의 붉은 배풍등 열매는 비록 주름이 많이 졌지만 진한 색깔입니다. 왠지 어떤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의 리듬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봅니다. 어느덧 발길은 키가 큰 매자들의 마을로 향하고 있네요. 빗물을 가득 담고 있는 매자의 붉은 열매들이 상쾌한 모습입니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을 떨어뜨리며 사뿐사뿐 춤을 추고 있습니다. 빗줄기의 리듬에 따라 유유자적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붉은 열매들이 달여있는 긴 가지에서는 뭔가 고요한 리듬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껍질이 단단해 보이는 어느 커다란 나무에서 작은 새 가지가 돋아나고 있습니다. 붉은 색감의 여린 가지 끝에서는 어떤 새로운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촉촉하게 비를 맞으니 머지않아 새순이 돋아날 듯합니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제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향하고 있나 봅니다. 아직 봄이 오려면 몇 번의 꽃샘추위를 견뎌내야겠지요. 하지만 머지않아 겨울 동안 안으로 간직해온 에너지들이 터져 나올 듯합니다. 또 새로운 계절과 함께 새로운 생명들의 노래를 듣게 되겠지요.      


카페에 들러 따끈한 커피를 한잔 마시며 라벨의 볼레로를 들어봅니다. 여러 가지 악기가 차례로 들려주는 멜로디가 마치 하나 둘 꽃이 피며 마침내 화사한 봄이 다가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즐겁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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