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강연이 있을 때 종종 주제에 맞춰 미술작품 한 두 개를 ppt. 에 넣어 강연을 진행합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강의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제넘은 얘기일 수 있으나 미술세계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는 조그마한 촉매제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즈음의 나이에는 나름의 느낌을 공유하거나 소중함을 확장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부터 서양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여러 책을 구입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역사인식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양미술사에 관한 책을 비롯해서 인터넷으로도 여러 자료를 검색하는 열정도 나름 좋았고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가는 열정도 쌓이는 것 같아 의미가 있습니다.
다양한 시대와 화가를 다룬 미술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지금의 노력이 젊었을 때부터 있었으면 좋았겠구나 하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지금 무엇에라도 관심을 두고 몰두하는 시간을 갖는 데에는 결코 늦은 때가 없다고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미술은 조금 나이가 들어서 미숙하지만 흥미를 갖고 몰입하는 행위 이 자체가 좋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기쁨이나 감동을 느끼게 되고 또 어떤 것은 삶을 생각할 수 있도록 진지함을 선사해 주기도 합니다. 무언가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환영받습니다. 세상의 온갖 신기술과 경제환경의 변화 등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특정 작품을 감상하고 그 느낌을 갖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미술은 분명히 우리를 과거의 특정 시대와 연결시켜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현재의 모습이고 혹은 미래의 새로운 사회를 전개시킬 수 있는 예측성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미술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은 예고도 없이 스케치 북과 물감을 들고 학교 뒤에 있는 산에 올라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그날따라 준비물도 빼놓고 학교에 갔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학교 뒤에 있는 산에 오르는 동안 내내 “어찌할까”고민만 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친구 옆에 달라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 들킬까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다음 시간 물리 시간이지? 물리 선생님과 얘기가 되었으니 2시간 동안 그려”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형극과 같았습니다.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학교나 산의 풍경을 그려서 제출한다” “중간고사 성적이야. 알겠지?”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친구들은 저마다 스케치북에 쓱쓱 그리기 시작했으나 선생님이 움직이면 슬슬 피하기만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날 즈음 '도망자'는 선생님에게 걸렸습니다. 심한 꾸중보다는 심플하게 “중간고사 성적은 0점”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친구 녀석이 그리는 걸 보다가 불현듯이 친구에게 스케치북 한 장을 떼어 달라 해서 그곳에다 몇 줄의 글을 썼습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산을 보면서 생각난 것들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시 형식을 빌린 것이었는데 아무튼 종이에 이리저리 쓰고는 시간에 맞추어 그냥 제출했습니다.
사실 그림 그리는 것은 소질도 없고 표현능력도 형편없는데 정말 ‘이판사판’이었습니다. 나중에 중간고사 성적을 확인해 보니 나름 괜찮은 성적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뒤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술마을에는 미술이나 문학이나 음악이나 모두 같이 살아”라면서 은근히 칭찬하셨습니다.
미술은 여러 의미가 있으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비밀이 많으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자극합니다. 미술은 사고(思考)의 원천이며 아이디어가 잠재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어쩌면 그 청소년기의 에피소드가 지금껏 간직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선생님께서 은근히 예술에 대한 접근방식을 가르쳐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량(雅量)에 대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죠.
몇 해전 루브르 박물관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작품 앞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작품을 감상할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렵게 봤습니다만 앞으로는 그림을 볼 때나 선정할 때 좀 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술에 대해 때로는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꼭 대형 박물관이나 규모가 큰 미술관에 가기보다는 작은 전시장이나 아담한 미술관에 자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어느 곳이든 미술적 감동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작품에서는 색채에 대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어느 작품을 보면 그림에서 나름의 스토리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받는 것 같아 좋습니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미술세계를 중년기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연륜이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인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아무튼 지금 시기에 미술을 감상하고 있는 제 자신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갤러리에서 만난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계속 그 앞에 서있고 싶었고 그냥 그것과 한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그림이 제 삶의 배경이었으면 하는 그 느낌은 아마도 ‘끌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