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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이 이야기

가스라이팅

by 설여사

바느질을 할 때 실을 길게 잡으면 시집을 멀리 간다는 말을 고등학교 다닐 쯤에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로는 바느질할 일이 있으면 실을 아주 아주 길게 잡았었다. 그리고 속으로 결혼을 하면 부모님과 멀리멀리 떨어져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시댁은 저 멀리 순천인데 정작 결혼하고 난 멀리 가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신도시에 신혼집을 차렸다.

결혼 후 멀리 떨어져 살았으면 부모님과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 년에 서너 번 만 보고 살았으면 부모님을 조금 애틋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30분 거리의 딸은 수시로 아빠가 부르면 달려가야 했다. 주말이면 아빠가 정해 놓은 식당에 모시고 가서 같이 식사를 해야 했고 친척이라도 오면 우리를 불러 손님 접대를 하라고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은 신도시보다 집값이 싼 친정 근처로 집을 넓혀 이사를 가자고 했다. 난 반대했다. 우리 아빠를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설마 사위를 딸처럼 부려 먹지는 않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나는 남편의 뜻대로 친정에서 5분 거리의 옆동네로 이사를 했다. 아빠는 그날 이후 우리를 더 자주 오라 가라 했다. 이사 후 남편은 휴일이면 아빠가 하는 현장에 불려 가서 운전기사 겸 잡일도 해야 했다.


아빠는 운전을 못한다. 7번이나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떨어지고는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봉고차가 있는 기사아저씨를 채용했으면서도 남편이 퇴근을 해서 집에 있거나 쉬는 날은 어김없이 호출을 해서 임금도 주지 않으면서 운전기사처럼 여기를 가자 저기를 가자며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켰다.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나랑 결혼한 죄로 직장 다녀와 쉬지도 못하고 아빠에게 끌려다니는 남편을 보니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다. 괴팍한 아빠에게 차마 말을 못 하고 엄마에게 남편을 더 이상 쉬는 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 뒤로 조금 덜 하긴 했지만 아빠는 그래도 본인이 볼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우리를 불러 일을 시켰다. 그러면서 아빠는

"어쩔 수 없어. 네가 큰딸이니(큰 사위니까) 아빠 일을 도와줘야지. 안 그래?" 하며 말하곤 했다. 그땐 몰랐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가스라이팅이었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던 것이다.

"아빠는 일찍 죽을 거니까 아빠한테 잘해야 한다."

"네가 큰딸이니까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한다."

"네가 큰딸이니까 엄마, 아빠를 도와줘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라고....

젠장.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이었나 보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나는 결혼을 하고도 계속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밤이고 낮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부르면 친정엘 가야 했고 아빠가 원하는 곳을 가자면 운전해서 모시고 가야 했고 하라면 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공포 속에서 가스라이팅 당하며 살았던 나는 결혼을 하고도 계속 그렇게 거역하지 못하고 순종적으로 살았다.


나는 첫째를 제왕 절개로 낳고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해서 친정으로 갔다. 그땐 산후조리원이 거의 없었다. 친정엄마가 있으니 친정에서 일주일 정도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나는 괴팍한 아빠와 서먹서먹한 엄마가 있는 친정에 가기 싫었는데 딸의 도리로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친정에 들어가자 아빠는 첫 손주를 반갑게 반겨주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친정에서 불편한 일주일을 버티고 방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고 서먹한 엄마도 없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니 너무 좋았다. 자상한 남편은 두 달 동안 내가 설거지도 빨래도 못하게 했다. 아이를 씻기는 것도 모두 남편이 했다.

2년 뒤 둘째도 제왕절개로 낳았다. 그땐 친정 옆동네에 살았으니 산후조리를 친정으로 안 가려고 생각했었다. 아기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태워대는 아빠도 싫었고 남편이 엄마보다 더 편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퇴원 후 친정으로 갔다. 첫째가 있으니 불편해도 친정엄마가 돌봐주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산후조리를 하러 간 다음다음날 동네 아줌마들이랑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아빠 식사를 잘 챙겨주라며 이른 새벽 집을 떠났다. 미리 얘기했으면 바로 친정으로 안 오고 우리 집으로 갔을 텐데 엄마는 내가 산후조리를 하러 간 다음날 저녁에 나에게 여행을 간다고 알렸고 그다음 날 아침에 아빠를 나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 참 황당했다. 내가 산후조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엄마가 나에게 아빠를 맡기려고 오라고 한 것이었다. 아빠는 누군가 차려주지 않으면 절대 혼자 밥을 챙겨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갓난아이를 돌보느라 잠도 잘 못 자고 일어나 새벽에 일을 나가야 하는 아빠의 식사를 챙겨드리고 낮엔 아이들을 챙기고 저녁에 돌아온 아빠의 저녁식사를 챙겨드렸다. 참 서운했다. 이번에 안 가면 평생 못 가는 것도 아닐 텐데 제주도 여행이 뭐라고 제왕절개로 애를 낳고 온 딸 산후조리를 팽개 치고 엄마는 도망가듯 여행을 가버렸을까. 또 한 번 엄마에게 큰 실망을 했다. 엄마가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바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와 부모와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집살이 같았던 친정 근처에서 7년을 살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신도시는 생각보다 집값이 비쌌지만 나는 32평에서 23평으로 집을 줄이면서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23평 집은 좁았다. 아이들 방에 책상과 옷장을 넣어주니 꽉 찼고 침대를 넣어줄 수가 없었다. 2년 정도 지내며 아이들에게 침대를 넣어줄 수 있는 방을 주고 싶었다. 그러며 부동산에 관심을 기울이던 중 앞 단지에 32평 급매가 나왔고 대출을 받으면 그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반대하는 남편을 졸라 집을 보러 갔고 남편도 싫지 않은 내색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돈이 없었다. 남들도 다들 대출받아 집을 사는데 우리도 한번 대출을 받아보자고 남편을 설득하고 일단 급매로 나온 집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은행에서 대출금이 나오는 한 달 후 갚겠다고 하고 계약금 2000만 원을 한 달만 빌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퉁명스럽게 내일 집으로 와서 아빠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는 200만 원의 가계약금을 걸어 놓고 월요일에 계약금 2000만 원을 송금하겠다고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쓰고 다음날 토요일 오후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남편과 친정으로 갔다. 엄마는 며칠 전 아빠가 일본을 다녀왔다며 나에게 기모노를 입을 여자가 새겨진 손수건 두 장을 챙겨주었다.


얼마 후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나와 남편을 흘긋 보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통장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는

"내가 너네 은행이야?"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앉아있는 내게 통장을 던지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난 어이가 없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나는 문이 닫힌 화장실을 가만히 쳐다보다 통장을 바닥에 두고 손수건 두장을 챙겨 들고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집을 나왔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나를 쳐다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고 나는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 모멸감은 뭔지... 내가 돈을 그냥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잠시 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빌려주기 싫으면 빌려줄 수 없다고 하면 될 것을 남편 앞에서 나는 너무 창피했다. 그동안 내가 애써 숨기고 살았던 나의 민낯을 완전히 까발려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남편 앞에서 만큼은 지키고 살았던 내 자존감이 한순간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가 왜 손수건을 챙겨줬는지 알 것 같았다. 난 그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차 안에 남편이 있는데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리고 나는 부동산에 전화를 해서 집을 살 수 없게 되었다고 계약 파기를 했고 매도인에게도 전화를 받아 치욕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을. 그리고 남편의 만류에도 엄마 아빠가 당연히 나에게 돈을 빌려줄 거란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한 벌이었던 것 같다.


며칠이 지나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왜 돈을 안 가져갔냐고. 엄밀히 말해 돈이 아니라 통장이었고 그렇게 던진 통장을 '감사합니다.' 하고 가져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데 아빠는 본인이 한 행동을 잊은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나도 그런 아빠에게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집을 안 사기로 했다고 이야기하고 나도 내 감정을 애써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전화를 끊었다. 다시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며...


아빠와 달리 엄마는 나에게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딸이 아빠에게 그렇게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 전화로든 다음에 만나서든 괜찮은지 물어봐줄 만도 한데 나의 엄마는 늘 그렇듯 나의 감정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신도시는 미친 듯이 집값이 올랐고 그 후 5년 정도 흘러 다시 집값이 많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 날 엄마는

"요즘 집값이 많이 내렸다던데 예전에 집 안산게 다행이지?" 하며 뜬금없이 말을 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어이가 없었다.

"엄마, 지금 집값이 많이 내렸어도 그때 집값보다는 비싸거든요."

나의 말에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렇게 엄마는 그때의 일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나 보다.

'속상했지.'한마디면 됐을 일인데....


그렇게 부모님 덕에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대출도 없이 우리 힘으로 우리는 첫째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아이들 방에 침대가 들어가는 27평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부모님께 나는 필요할 때 불러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내가 정작 의지하려 하면 언제나 매몰차게 나에게 등을 돌렸다. 나도 그런 부모에게 점점 더 형식적으로 대하는 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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