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막냇동생이 떠나고 아빠는 목욕탕을 그만두고 외삼촌 가게에서 보일러 설비일과 집수리, 논이나 집 터에 지하수를 파는 일을 다시 다녔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아빠는 우리가 사는 낡은 이층 집을 수리했고 집 뒤 빈터에 가게를 손수 지었다. 아빠는 그 가게에 외삼촌처럼 보일러설비와 지하수 파는 일을 하는 가게를 차렸다.
아빠가 설비가게를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마을에 종종 나타나 점을 봐주던 법사 아저씨가 아빠를 찾아왔다. 그 법사는 아빠에게 사주를 봐주고는 10년 대운이 들었으니 운 받는 부적을 사라고 했다. 아빠는 그 법사를 의심했지만 몇 번을 찾아와 설득하는 법사에게 어느 날 부적을 샀다. 그날 밤 아빠는 엄청 희한한 꿈을 꾸었다고 했고 그날 이후로 진짜로 아빠가 대운을 받았는지 아빠에게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보일러설비와 지하수 파는 일은 물론이고 헌 집을 고치는 일이나 새집을 짓는 일까지 사람들은 아빠에게 맡겼다. 일이 많아진 아빠는 봉고차가 있는 운전기사를 채용했고 동네에서 일 잘하는 아저씨들을 그날그날 채용해서 현장으로 실어 나르며 일을 했다.
일이 많아질수록 견적서 쓰는 일도 많아졌다.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는 아빠는 글 쓰는 것과 계산하는 것을 잘 못했고 싫어했다. 그래서 밤마다 엄마나 나를 불러 견적서를 작성하게 했다. 아빠가 불러주는 대로 우리는 손으로 써가며 견적서를 작성했다. 아빠는 생각나는 대로 견적서를 작성했다가 고쳤다가 다음날 또 맘에 안 든다고 고치고 뭐가 빠졌다고 고치고 하나의 견적서를 작성하려면 10번 이상은 고쳐야 했다. 아빠와 견적서 작성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작업이었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우리에게 불러주면서 아빠는 짜증을 냈고 엄마와 내가 조금이라도 잘 못 받아 적거나 계산이 틀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던 나는 아빠와 마주 앉아 견적서를 작성하는 날이 많았다. 아빠와 견적서를 작성하려고 마주 앉아있으면 그렇게 불안하고 불편했다. 일이 많아질수록 아빠는 화가 더 많아졌고 집에 오면 식구들에게 이유 없이 매일 짜증을 부렸다.
아빠에게 대운을 안겨 준 부적은 아마도 다른 가족에겐 불운의 부적이었던 것 같다.
일용직을 다닐 땐 술을 먹고 쌍욕을 하며 우는 게 전부였던 아빠는 일이 많아질수록 더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이 되었고 어느 날 저녁 엄마와 다투다 상을 엎었고 분위기가 엄마를 때릴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폭력에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달려가 아빠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를 무서워하던 나였는데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집을 나갔고 나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이 상황이 이렇게 끝난 것에 안도했고 그런 나를 엄마는 한참을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엄마에게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줄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엄마에게 돌아온 말은 "아빠에게 소리 지르고 대드는 못된 년"이었다.
나는 내 부모에게 또 실망했다.
나는 아빠의 공포와 엄마의 짜증을 피해 잠시라도 집을 나가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21살에 공무원이 되겠다며 종로에 있는 공무원 학원에 등록을 하고 공무원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 공부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고 뚜렷한 목표도 절실함도 없었다. 나는 그냥 부모님이 있는 집에서 나가 돌아다니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계획도 없이 대충 공부하고 닥치는 대로 시험을 봤다. 그리고 한 번도 시험에 붙지 못했다.
1년 정도 그렇게 지내다가 22살이 되었다. 이번엔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께 정식 대학을 보내 달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취업도 계속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등록금도 싸고 입학하기도 쉬운 방송통신대를 가기로 했다. 명맥상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으니 과는 행정학과를 선택해서 입학을 했다.
대학 생활은 너무 좋았다. 왜냐하면 학교 특성상 수업이 밤에 많이 있었고 대부분이 직장인이었던 대학 동기들과 밤에 스터디를 하는 날이 있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집에서 나오는 날이 더 많아졌고 저녁에 귀가하는 아빠와 마주치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화점 직원이었던 입학동기 언니가 알바를 주선해 주어서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피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나고 23살이 되었다. 아직도 남들처럼 내세울 직장도 없었고 백화점에 알바를 계속 다녔지만 늘 갑갑했다. 여전히 목표도 없었고 꿈도 없었다. 집에는 나에게 관심도 없는 무심한 엄마와 괴팍한 아빠만 있었다. 나는 가출을 하고 싶었다. 부모를 떠나서 살면 이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한참 힘들어하던 4월. 신학기라고 혜화동에서 일일주점이 있었고 그곳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버스에 동기 오빠가 함께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산엘 가고 싶었다. 혼자 가기는 용기가 없었는데 마침 버스 안에 그 오빠가 보였다. 그 오빠에게 내일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오빠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나는 같이 북한산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그 오빠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다음날 그 오빠와 북한산엘 갔다. 북한산에 다녀와 오이소주를 마시며 오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다음 주에도 둘은 북한산엘 같고 또 내려와 오이소주를 마셨다.
그다음 주에도 북한산엘 갔고 또 오이소주를 마셨다.
그다음 주에도 북한산엘 갔고 이번엔 막걸리를 마셨다. 그날 그 오빠는 막걸리를 마시다 나에게 자기와 결혼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이 오빠가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누구라도 좋았다. 나를 집에서 나오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가출을 하고 싶었는데 한 달간 산에 다녔더니 남편감이 생긴 것이다. 역시 산은 좋은 기운이 흐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