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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이 이야기

결혼

by 설여사

아빠는 사윗감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탐탁해하지 않았다. 아빠가 태어난 고향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다. 주소는 충청도 금산으로 되어있지만 생활지역은 전라도 무주였는데도 아빠는 전라도를 한번도 가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전라도 사람들을 욕하며 자신은 충청도 사람이라고 우기며 살았다. 아빠가 젊었을땐 전라도 사람이라 하면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더했을 것이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 살아가던 아빠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느끼며 살았을 것이고 아빠는 본 적 주소가 충청도인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아빠는 전라도 사위는 절대 안 된다고 어린 딸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전라도 순천 사람이다. 아빠는 처음 남편을 보고 전라도 사람이라고 싫어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공기업에 다니고 신도시에 아파트도 분양받아 놓은 착실한 청년이었다. 아빠는 전라도사위라는 게 맘에 안 들었지만 다행히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1년 반의 연애 끝에 나는 결혼을 했다. 가출 대신 출가를 한 것이다. 남편이 나쁘지 않았지만 사랑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게 뭔지 몰랐고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았다. 나는 살다가 남편이 아빠 같은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변하면 이혼을 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결혼과 동시에 남편에게 선언을 했다.

"내가 싫거나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언제든지 바로 이혼해 주겠다"라고.

나는 결혼을 하고도 언제든 남편에게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용순이는 나를 보며 예뻐해 주고 웃어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이 남자를 믿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은 나에게 생각 이상으로 잘해줬다.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랑을 나에게 주었다. 결혼하고 처음 저녁근무를 나가는 날엔 이불을 깔아 주더니

"내가 밤에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무서워하지 말고 잘 자고 내일 만나. 사랑해~" 막 이러는 거다. 난 처음엔 이상했다.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매일매일 나에게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처음엔 낯간지러운 말에 쑥스러웠고 적응이 안 됐다.

남편이 "사랑해."라고 말하면 난 퉁명스럽게 "응."이나 "그래."로 대답했다.


사랑해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적도 말해본 적도 없이 24년을 살아온 나에겐 '사랑해'는 너무너무 낯선 단어였다

그러며 2년이 넘게 흘렀다. 늘 남편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받기만 하는 게 미안했다. 나도 남편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사랑해"라고 말을 했고 나는 엄청 엄청 용기 내서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진심으로 좋아했다.


남편은 결혼 후 마트에서 두부를 하나 사도 꼭 자기가 들었다. 무겁다고 자기가 들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남편보다 체격도 크고 몸무게도 훨씬 많이 나가는데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은행 볼일이 있어서 간다고 해도 자기와 꼭 같이 가자고 했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혼자 보내냐며 남편이 쉬는 날 같이 갔다. 결혼을 하니 안 겪어본 세상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엔 집에 전기 휴즈가 나가면 내가 두꺼비집을 열어서 휴즈를 갈아 끼웠고 전구가 나가도 내가 갈고 벽에 못질도 내가 하고 무거운 짐도 내가 나르고 심부름은 다 내가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다 해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키우면서도 남편은 아이들에게도 잘해주었지만 변함없이 나를 더 아껴주었다.


그런 남편을 나는 10년 동안 믿지 못했다. 언젠가는 나를 배신할 거 같은 생각에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결혼 10년 차 어느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 집에서 있던 나는 '남편도 변함없이 나에게 잘해주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고 모든 게 좋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해하며 힘들게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다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10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주는 남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나의 삶은 내가 만드는 건데 내가 나를 자꾸 불행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나를 인정 안 하고 밀어내듯 나도 남편을 밀어냈던 것이다. 친정엄마처럼 안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친정엄마처럼 살고 있는 나를 보니 한심했다. 그래서 바로 결심했다. 이젠 불안해하지 않고 남편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말이다.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을 살기로 했다.


그날 이후 남편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안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마음이 평안해졌다.

친정에서 24년 동안 살아왔던 고단했던 삶이 결혼하고도 10년 동안 오롯이 행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바보같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내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10년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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