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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이 이야기

농사꾼이 된 아빠

by 설여사

빨리 죽는다고 말하던 아빠는 본인이 환갑까지 살면 환갑잔치를 꼭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새 아빠는 환갑을 맞이했고 스스로 셀프 환갑잔치를 준비했다. 환갑잔치를 할 큰 뷔페연회장도 직접 예약하고 우리가 입을 한복 맞춤집도 직접 지정해 주고 환갑잔치에서 노래를 부를 밴드와 가수도 직접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환갑잔치에 초대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야말로 쉬지 않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 덕에 성대하게 환갑잔치가 치러졌고 아빠는 만족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집을 전전하며 어렵고 힘들게 산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간질에 걸려 빨리 죽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환갑잔치까지 하며 여태 버티고 살아온 본인이 엄청 뿌듯했을 것이다.


환갑잔치를 무사히 치른 아빠는 이젠 다른 말로 나를 가스라이팅을 했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니. 나 죽으면 이 집 너 줄게. 아빠한테 잘해라."

엄연히 엄마가 있고 동생이 있는데 이 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고 예전의 순진하고 멍청한 용순이가 아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에게 한 번도 의지가 되어준 적이 없던 아빠의 감언이설에 이젠 속지 않는다. 아빠는 절대 자신의 돈을 한 푼도 다른 이에게 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 죽으면'이라는 단서가 붙었겠지만. 난 아빠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럼 엄마는 어디서 사나요.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다 쓰고 죽으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명절이나 술에 취한 날이면 동생과 제부가 있는 데에서도 그런 말을 했다. 이젠 제법 나이가 들어 아빠의 가스라이팅에 호락호락당해주던 예전의 순진한 용순이가 아님을 아빠도 안 것이다. 예전에 비해 아빠에게 반격도 가하고 거절도 할 줄 아는 용순이를 아빠는 주지도 않을 돈으로 구워삶으려 했다. 그러나 난 돈이 많든 적든 그저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부모이기를 바랄 뿐이었고 엄마, 아빠가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며 나이 드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늘 평행선이었다.


환갑을 치르고부터 여유가 생긴 아빠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겠다며 춤을 배우러 다녔다. 엄마는 아빠가 댄스교습소에서 여자들과 춤을 추는 것을 엄청 싫어했고 바람까지 피고 다닌다고 아빠를 몰았다. 아빠는 그때마다 춤이 좋아 다닐 뿐 바람은 피우지 않는다고 우겼다. 나는 아빠가 바람은 피우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춤을 추러 다니며 즐거워하는 아빠가 보기 좋았다.

그리고 아빠는 여행사를 하는 지인과 틈만 나면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동남아뿐 아니라 유럽까지 해외여행을 다녔다. 엄마와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항상 혼자 다녔다. 엄마도 아빠처럼 동네 아줌마들과 혼자 여행을 다녔다. 딸 둘 결혼시켜놓고 둘이 오붓이 여행 다니면서 사이좋게 살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던 둘은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며 각자 삶을 살았다. 아빠는 춤에 미쳐서 나돌았고 엄마는 나만 보면 그런 아빠를 욕했다. 아빠가 있을 땐 온갖 비위를 다 맞추다가도 아빠가 자리를 비우면

"저 인간이 ~~~"

"네 애비가~~~" 하며 욕을 시작했다.


아빠는 춤을 추러 다니면서 소일거리로 동네의 작은 빈 땅에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지어 식구들이 먹고 남는 농작물들은 댄스장에서 만나는 아줌마들에게 나눠주었고 댄스장 아줌마들이 좋아하자 한 해 한해 농사를 더 넓혀 더 많은 농작물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줌마들이 원한다며 고추를 심어 고춧가루도 만들어 팔았다. 처음엔 조금씩 팔던 고춧가루는 해가 갈수록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아빠는 그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수 없다며 나날이 고추를 더 많이 심었다. 처음 소일거리로 시작한 작은 텃밭은 몇 년 새 500평이 되고 그런 땅이 두 개가 되고 그것도 모자란다며 거기에 더해 1000평짜리 땅도 빌려 아빠는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60 중반을 넘은 아빠는 본격적인 농사꾼이 되어 2,000평이나 되는 남의 땅에 밭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몇 년 평화롭던 우리 집에는 다시 우환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살면서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며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농사일을 안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매일매일 들고 오는 푸성퀴를 다듬고 처리하는 일은 엄마의 몫이었고 여름엔 같이 고추를 따야 했고 고추를 말리는 것도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힘들다고 매번 하소연을 했지만 아빠는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노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못 도와주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아빠의 성화에 엄마는 할 수 없이 일을 도와야 했고 딸들을 보면

"내가 왜 서울년들 줄 고춧가루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며 아빠를 욕했다. 엄마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봄에는 비료를 사 오라고 하고, 농기구를 사러 가거나, 밭에 심을 모종, 농약을 사러 갈 때도 불러댔고 여름엔 고추를 따 달라고도 하고 가을엔 고춧가루를 팔러 갈 때도 우리를 불렀다.

춤을 추러 다니고 소소하게 작은 텃밭을 할 때의 아빠는 싫지 않았다. 그때는 자잘한 심부름을 시켜도 당연히 해 줄 수 있는 일이었고 힘들지 않았다. 우리도 아빠 덕에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도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2,000평이나 되는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 아빠의 욕심이 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추심기가 한창인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동생네 식구들까지 모두 모여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빠는 마당에서 모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그날은 점심시간이 되어도 밭에서 오지 않았다. 엄마가 전화를 해서 고기 구워 먹게 오시라고 하니 한참 후 나타난 아빠는 대뜸 손자손녀가 맛있게 고기를 굽고 있는 데를 보더니 왜 마당에서 번거롭게 고기를 굽냐며 역정을 내신다. 아빠가 좋아해서 더운데도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혼자 3,000개의 고추 모종을 밭에서 심다가 들어와서는 우리에게 도와주지 않는다고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 큰 손자손녀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러 매번 따라오지 않는다. 몇 달 만에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를 아빠는 망쳐 놓았다. 그 뒤로도 아빠는 가족들보다 농사일이 먼저였다.

좋아하는 춤이나 추러 다니며 소소하게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며 몇 년을 편하게 살던 아빠는 농사꾼이 되어 예전처럼 화내고 짜증 내는 아빠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60대 중반 이후부터 10년이 넘는 동안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며 어깨가 아프다고 어깨 수술을 했고 또 몇 년 뒤에는 허리협착으로 고생을 했다. 그런 아빠에게 농사를 줄이고 엄마, 아빠 먹을 만큼만 하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아빠는 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내가 나이 들어 이것도 안 하면 뭐 하고 사냐?" 라거나

"다 너 좋으라고 농사짓는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거나

"네가 나 도와준 적 있어?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너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라고 언성을 높였다.

해가 지날수록 엄마, 아빠는 얼굴이 검게 그을린 진짜 농사꾼이 되어갔고 이제 70이 넘은 엄마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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