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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이 이야기

이젠 용순이는 없다.

by 설여사

빨리 죽는다던 아빠는 어느덧 70 후반이 되었다. 아빠보다 더 오래 살 것 같던 아빠와 갑쟁이 동네 아저씨들이 먼저 죽었다. 지금도 아빠는 여전히 오전엔 1,000평이 넘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오후엔 버스를 타고 30분이나 떨어져 있는 서울로 춤을 추러 다닌다. 아빠의 건강 비결인 것 같다.

여전히 꺾이지 않는 괴팍한 성격을 맞추고 사는 엄마가 불쌍했다. 그런데 몇 해 전 그렇게 아빠 욕을 하던 엄마가 "살아보니 그래도 네 아빠가 술을 먹고 힘들게 해서 그렇지 밥도 안 굶기도 쌀은 떨어지지 않게 해 줬다. 술만 안 먹으면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 정말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야... 내 나이 50이 될 동안 그렇게 아빠 욕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이라는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뒤로도 아빠의 욕은 계속되었다.


엄마가 70세가 되기 일 년 전부터 아빠는 나중에 돈을 줄 테니 돈 걱정 말고 엄마의 70세 생일을 잘 준비하라고 했다. 돈을 먼저 주고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줄 테니 잘해 주란다. 엄마는 아무리 좋은 곳을 모시고 가도 다녀와서 늘 '맛대가리 없는 곳, 나는 갈비가 제일 맛있더라' 라며 딸의 성의를 무시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자매가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친정 근처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갈빗집에서 외갓집 식구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70세 생신을 치렀다. 물론 현수막도 걸고 꽃다발도 준비하고 돈 봉투도 준비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엄마 고희를 치른 비용 1,0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돈을 안 줘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은행에 예치해 둔 돈이 있다며 만기가 되면 주겠다고 일 년 내내 나를 보면 말했다. 주고 싶으면 조용히 있다가 주면 될 것을 아빠는 일 년 내내 돈을 주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모시고 가는 차 안에서 나의 딸에게 아빠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너네 엄마랑 너한테 천만 원씩 줄게. 보태서 레이사라. 그 차 예쁘더라. 그리고 그 차로 나 좀 데리고 다니고, 그리고 너 왜 할아버지한테 용돈도 안 주냐. 그러면 안돼. 매달 20만 원씩 할아버지 용돈을 줘야지."라는 말에 뚜껑이 열렸다.

내가 그동안 매번 듣던 말을 이젠 내 딸에게까지 가스라이팅을 하는 아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딸 앞에서 차마 아빠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꾹 참았다.


그리고 며칠 후 아침 나는 폭발했다.

친구의 부탁으로 아르바이트를 가고 있는 출근길에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오늘 집에 올 수 있냐?"

난 너무 기분이 나빴다. 아니 은행에 예치해 둔 돈을 찾으러 가는데 까지 내가 같이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요, 오늘 바쁜데요."

"어... 그래? 그럼 내일은? "

"내일도 바쁘고요 이번 주는 시간이 없어요."

"그래? 그럼 돈 찾으러 가야 하는데 어떡하냐?"

언제부터 나에게 통장을 오픈하셨다고 혼자 돈도 못 찾으러 가셨는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기어이 은행에 가서 자신이 자식에게 돈을 주는 아빠라는 생색을 내고 싶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돈 필요 없어요. 안 주셔도 됩니다."

나의 말에 아빠는 당황하며

"어... 너 돈 필요 없어?"

"네 저 돈 필요 없어요. 제가 언제 돈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 돈 주실 생각 마시고 아빠 다 쓰세요."

그러고는 뒷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돈 주고 나를 얼마나 더 부려 먹으려고 그래요."

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 그래.... 알았다. "

그러고는 아빠는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꾹꾹 잘 참아왔었는데 왜 오늘 내 속마음이 입으로 튀어나왔는지.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 실수 한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50년 동안 참고 살아왔던 내 속마음을 이렇게라도 내비치는 것도 괜찮다고.


그 후 나는 엄마에게 전화가 오길 바랬다. 전화가 와서 아빠랑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보면 내가 말실수를 했다고 잘못했다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아빠가 나와 통화를 하고 화를 많이 냈다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전화를 한 건 동생이었다. 엄마는 늘 아빠의 잘못된 행동을 나에게 말하지만 막상 아빠와 나와의 문제에선 늘 모른척한다.


그 후 친정에 갈 일이 있으면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고는 아빠는 우리를 피해 바로 외출을 했고 나는 엄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바로 집으로 도망을 왔다. 그렇게 허구한 날 우리를 찾아대던 아빠는 일 년 동안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서로 화해를 하고 풀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그 후 누가 먼저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서로를 불편해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거리낌 없이 나를 대하던 부모님이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이젠 아빠의 허드렛일 심부름도 엄마의 푸념도 듣지 않게 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빠의 가스라이팅처럼 큰딸이라는 멍에를 지었지만 일찍 죽는다던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후회하며 서러워 우는 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부모의 큰딸로 사는 게 버거웠지만 그동안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큰딸이니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고 고마워하지도 않는 부모와의 쳇바퀴 도는 50년의 용순이의 삶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버겁게 느껴졌다.

내 나이 50살쯤 살면 엄마, 아빠가 어느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질 줄 알았는데 나의 부모는 아직도 젊다. 50살의 용순이의 삶은 여전히 좋은 소리 한번 못 들으며 부모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다.

만 50이 되던 해 더는 내 부모의 자식인 지긋지긋한 용순이로 살기 싫었다. 그래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바꾸고 3년이 흘렀다. 3년 만에 용순이의 삶에서 벗어난 것일까? 나의 부모는 이제 나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K-장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애쓰며 살았다. 그러나 이젠 애쓰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 힘들어 딸 따위에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부모였지만 용순이는 일찍 죽을 아빠에게 아들 못지않은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괴팍한 아빠 뒤치다꺼리 하느라 힘들게 사는 엄마를 다독여 주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노력한다고 괴팍하고 무뚝뚝한 아빠와 엄마의 성격과 그동안 살아오며 형성된 성향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아무리 안타까워도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몫은 그만큼인 것이다.


이젠 버겁고 힘든 K-장녀 노릇 때려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살기로 했다.

어느 책에서 보았다. '완벽하려 애쓰지 말아라. 길게 봐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율하라'(주1)라는 글을. 이런 말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이제라도 그렇게 살려고 한다. 아직도 길게 봐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주1>은유, 해방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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