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나쁜 년

by 설여사

어버이날이 드뎌 지나갔다.

불효녀 못된 년 설여사는 어버이날이 오기 한참 전부터 스트레스가 쌓였다. 어버이날 전에 연휴가 4일이나 있었다. 그러나 설여사는 연휴에 친정엘 가기 싫었다. 설 때 다녀오고 전화도 한 번 안 했다. 당연히 부모님도 전화가 없었다. 근데 왜 계속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걸까? 나만 전화를 안 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나쁜 년인 것 같지. 친정 식구들에게 챙김 받아본 적도 없고 나 걱정하는 전화를 해 주는 부모님도 아닌데. 엄마 닮아서 전화하는 걸 잘 못하는 걸 수도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아빠의 가스라이팅 때문일 거다.

"딸년이니까 당연히 부모한테 잘해야지."

의무만 강조되었던 딸년의 삶. 그 말을 50년 넘게 듣고 살아서일까?


딸자식 다 필요 없다고 내 말 따위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큰소리 뻥뻥 치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던 아빠가 내가 아빠에게 서운한 소리 한 번 한걸 괘씸해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걸 지켜보던 나도 조금 열려있던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젠 지쳤다. 나도 이제 착한 딸년 노릇하기 싫다. 어차피 난 내 부모에게 나쁜 딸년이니까. 그러기를 벌써 1년이 넘었다.


어떻게 핑계를 대야 하나? 어떻게 친정엘 안 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나쁜 년이지만 차마 어버이날 지척에 살면서 안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연휴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날 하고 싶지 않은 숙제를 억지로 해치우듯 후다닥 그냥 어버이날 당일 찾아뵙고 점심이나 먹고 오자 마음을 먹었다. 용기를 내서 연휴 며칠 전에 어버이날 방문하겠다고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이젠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큰 용기를 내야 한다.


어버이날 아침엔 일어나 기도를 드렸다.

오늘 하루를 살려면 기도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모님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 하루가 잘 지나가게 해달라고.


친정집에 도착해서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가 마당으로 나오며 밥을 먹으러 가잖다. 아빠가 원하는 또 고깃집을 갔다. 원하는 곳을 가서도 고기가 맛이 없다고 불평이다. 욱하고 무언가가 올라오지만 꾹 참는다. 그냥 맛이 있든 없든 드시면 좋으련만 저렇게 콕 집어 불평을 입으로 내뱉는 아빠다. T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식사 중 졸지는 않았다. 엄마가 싫어하는 서울년들 줄 고추를 심느라 힘들어서 매년 피곤해하며 반쯤 감긴 눈으로 식사하는 아빠를 볼 때면 불편하고 짜증이 치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졸지 않고 식사를 하시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았다.


엄마는 식사도중 면전에 있는 아빠를 험담하려 한다.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조용하게 밥만 먹었다. 좋은 말을 하고 싶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하는 말들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집은 입 열면 남의 험담이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밥만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얼른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는 커피 한잔을 안 먹고 간다는 엄마의 투덜대는 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하고 도망 나왔다.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애썼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주 조용히 아무 일 없이 어버이날이 마무리된 것 같아 안도가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왠지 나쁜 년이 된 것 같고 기분이 더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서점에 갔다. 사려고 했던 책을 사고 둘러보다 김재식 작가의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만으로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싫은데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그동안 노력했잖아. 나도 이제는 지쳤다고.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좋은 사람인 척 살 필요는 없는 거야.'

그렇게 나쁜 년인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어버이날이 지나고 이 글을 썼고 바로 브런치에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쓰면서도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나는 나쁜 년이었고 뿐만 아니고 못난 년이었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고 마무리하지 못했고 그 뒤로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


남한테는 친절하자 잘해주자 하면서 부모한테 그것밖에 못하는 못나고 나쁜 년이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싫은 걸까?

며칠을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듯 김재식 작가의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책을 읽으며 나를 다독였다. 내 안에서부터 해답을 찾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무리 부모자식 관계이지만 나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나도 아주 나쁜 년은 아닌데 부모님 앞에만 서면 아주 못된 년이 되는 것 같아.'

'그냥 지쳤을 뿐이야. 조금만 참아보자. 이 시기가 지나면 좋아질 수도 있을 거야.'

'좋은 사람에게만 잘하고 살면 되지. 나랑 안 맞는 사람들에게 너무 애쓰며 살필요 없잖아.'

'그렇다고 안 보고 살 수도 없고, 어찌 됐든 풀고 살아야 나도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풀면 또 예전처럼 나를 귀찮게 할까 봐 싫고....'

계속 계속 생각하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나에겐 너무 막막한 숙제다.


글도 쓰기 싫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2주 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브런치스토리에서 알람이 왔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답니다. 오늘 떠오른 문장을 기록하고 한 편의 글로 완성해 보세요.'


그래... 그냥 있는 그대로 내 감정을 다시 써보자 맘먹어본다. 이것도 또한 나인 것이다.

부모님께 그러지 말고 잘해드려야지하는 마음은 있는데 행동이 안돼서 속상하고 마음이 아픈 거고 그래서 스스로 나쁜 년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근데 부모에게 나쁜 년이고 못난년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나쁜 년은 아니잖아. 나도 누구에게는 이쁜 사람이고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인데. 너무 나쁜 년 포커스에 맞춰 맘 아파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부모에게도 다시 좋은 딸이 되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마음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믿으며 다시 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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