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나뭇잎 틈새로 빛이 들어오는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며 호들갑이던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 빛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냐고 물으셨다. ‘볕뉘‘. 고개를 젓는 내게 손가락 끝으로 글씨를 써가면서까지 읊어주신 단어였다.
사전을 찾아보니 한자는 아닌 것 같다. 뜻도 세 가지나 있다. 다정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기어코 어두운 곳을 비춰주는 햇볕. 타인으로부터의 보살핌이라는 뜻 또한 이 안에 들어 있다. 사랑이 많은 단어다. 그렇게 불현듯 누군가에게 볕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의 마음이 얼마나 그늘져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 안에 빛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곳을 조명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근래는 마음이 어려울 때마다 다잡는 연습들을 한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는, 색채가 강한 표현에 비해 이 마음들은 조금 더 연한 색을 띤다. 그러면서도 빛깔이 섞여있어 오묘하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어렵다, 이 말로밖에는 아직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이렇듯 마음이 '어려울 때' 감정적인 말과 행동은 덜어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되 감성 훈련을 지속해나가는 일은 보기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이다.
가령 이런 거다. '나'와 '나의 입장', '나의 상황'과 '나의 마음' 같은 것들을 강조하고, 강조를 넘어 강요하려는 욕심이 꿈틀댈 때 이를 억누르는 것. 너에 대한 아쉬운 지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일시적으로 마주한 너의 단면에 비해 네가 내게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잊지 않는 것. 너 또한 나를 참아주고 있을 때가 존재할 것임을 기억하는 것. 나는 이 모든 것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난 그 과정을 통해 내가 감히 좋은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믿기지 않을 만큼 각박한 오늘 속에서 어떤 선순환의 출발점이 되기를 열망한다.
성장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다정하게 구는 것과 심지어는 당신(You)한테로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까지도. 얼만큼이 내 의지일까. 당신이 주는 마음이 내 의지가 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늘 내가 외로웠던 순간에, 이 일상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느꼈던 찰나에, 당신이 내 곁 혹은 내 안 어디쯤 서 있었을지 체감도 짐작도 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나의 이 모든 고백들이 이어지는 동안 내 마음이 괜찮아진다는 것. 꼭 당신이 볕뉘처럼 나를 비추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이 펜의 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내 마음이 괜찮아지는 거,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이 당신에 대하여 알려주는 방법이 아닐까. 나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것도 당신이 건네는 위로의 방식이라면.
사랑해. 사랑한다. 이 고백 하나에 난 내일도 살아갈 수 있겠지.
종이의 끝에 도달하니 당신이 준 사랑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랑으로 너를 다시금 사랑할 용기 또한 얻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