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세계 속을 걷다

금요일 오후, 나를 멈춰 세운 영상

금요일 오후 3시. 국가연구개발사업 평가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여러 과제를 검토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예상 범위 내였다. "AI 기반 ○○ 기술 개발", "딥러닝을 활용한 △△ 시스템" 같은 제목들. 25년간 R&D 기획을 해온 나에게는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런데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보여준 영상 하나가 나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이것은 게임도, 동영상도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입니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얼마 전 AlphaFold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그 사람이 무대 위에서 한 말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누군가 화살표 키로 3D 공간을 이동하고 있었다. 방 안을 돌아다니다 벽에 뭔가를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돌아오면 아까 그린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모든 픽셀이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있다는 설명이 들렸기 때문이다.


90년대 게임 개발자가 꿈꾸던 세계


데미스는 90년대에 게임 개발자였다고 했다. 나도 기계공학 박사과정 시절, 시뮬레이션 프로그래밍에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3D 모델링 하나 만드는 데 며칠씩 걸렸고, 물리 엔진을 구현하려면 수십 개의 미분방정식을 직접 코딩해야 했다.

데미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폴리곤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들고, 빛의 반사를 계산하고, 물체의 움직임에 물리 법칙을 입혔을 것이다. 그 고된 작업을 기억하기에, 지금 Genie 3가 하는 일이 더 놀라웠을 것이다.

"수백만 개의 유튜브 영상을 보며 스스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깨우쳤습니다."

프로그래머가 하나하나 코딩해줄 필요가 없다. AI가 영상만 보고 물이 어떻게 반사되는지, 재질이 어떻게 흐르는지, 물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아낸 것이다.

나는 문득 지난주 평가했던 과제가 떠올랐다. "AI 기반 시뮬레이션 고도화" 같은 제목이었는데, 사실 전통적인 물리 엔진에 머신러닝을 약간 얹은 수준이었다. 근본적인 접근이 바뀐 건 아니었다.

하지만 Genie 3는 다르다. 아예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것이다.

"개 사진 보여줘"라고 타이핑하면 개가 나타난다. "닭 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렇게 만들어진다. "제트스키"를 요청하면 실시간으로 장면에 추가된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 떠오른 질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로봇공학 관련 신규 과제 기획 회의가 잡혀있다. 참여기관 10곳, 5년간 100억 원 규모의 컨소시엄형 과제다. 제안서를 검토하면서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데미스의 설명을 들으니 더 선명해졌다. 구글은 로봇을 위한 '안드로이드'를 만들고 있다. 범용 로봇 운영체제. 스마트폰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표준화된 OS가 있으면 로봇 산업도 급성장할 것이다.

"노란색 물체를 빨간 양동이에 넣어줘"

실험실에서 Gemini 로봇 모델에게 이렇게 말하면, 그냥 그렇게 한다. 자연어를 바로 모터 움직임으로 변환한다. 우리가 지금 기획하고 있는 과제들은 대부분 "로봇 제어 알고리즘 개발"이나 "그리퍼 정밀도 향상" 같은 것들인데, 어쩌면 우리는 또 틀린 질문에 답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영상 속 데미스는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앞으로 2년 내에 로봇공학 분야에서 진짜 '와우' 모먼트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시기입니다."

2년. 우리 5년 과제가 끝나기도 전이다.


점심시간, 동료와의 대화


점심을 먹으면서 생명공학 전공 동료에게 AlphaFold 이야기를 꺼냈다.

"데미스가 노벨상 받은 거 알아?"

"알지. 단백질 구조 예측. 우리가 50년간 2%밖에 못 푼 걸 AI가 98% 풀었잖아."

"근데 그게 끝이 아니래. 지금은 Isomorphic Labs라는 회사 만들어서 신약 개발 하고 있대. 10년 걸리던 걸 몇 주로 줄인다고."

동료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단백질 구조 아는 거랑 약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

나도 그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데미스의 설명을 들으니 접근법이 흥미로웠다. 순수한 AI 학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하이브리드 모델'을 만든다. 화학과 물리의 기본 법칙 - 원자 간 결합 각도, 원자가 겹칠 수 없다는 제약 - 을 AI에 미리 입력한다.

"이론적으로 AI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지만, 그러면 학습 능력의 상당 부분을 낭비하게 됩니다."

이 말이 와닿았다. R&D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처음부터 개발할 필요는 없다. 이미 알려진 지식은 제약 조건으로 넣고, AI가 우리가 모르는 부분에 집중하게 하는 것. 효율성의 문제다.

"내년에 전임상 단계 들어간다던데."

동료가 눈을 크게 떴다. 암과 면역 질환이 타깃이라니, 정말 10년 안에 판도가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노트를 펼치다


토요일 오전.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며 이번 주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데미스가 말한 AI의 한계. "진정한 창의성이 없다"는 것.

"AI는 우리가 제시한 문제를 증명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가설이나 이론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가 제시한 테스트가 인상적이었다. 1901년까지의 지식만 학습한 AI가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특수상대성이론을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을까?

AlphaGo가 바둑의 37수를 창조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나는 노트에 적었다.

"R&D 평가에서 우리가 진짜 봐야 하는 것은?"

논문 몇 편?

특허 몇 건?

아니면... 연구자가 얼마나 깊이 그 문제를 고민해왔는가?

이번 주에 평가했던 과제 제안서들이 떠올랐다. ChatGPT가 완벽하게 써준 것 같은 문장들. 깔끔하지만 영혼이 없는 텍스트들.

송길영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요즘 이메일이 영어로 오는데 너무 잘 쓴 이메일이 와요. 근데 막상 만나보면..."

그래서 면접이 다시 중요해진다고. 텍스트는 AI가 만들 수 있지만, 10년간 한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연구자의 눈빛은 만들 수 없으니까.

월요일 회의에서 제안해봐야겠다. 면접 평가 비중을 50%로 높이자고.


10년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요일 저녁. 일주일 동안의 생각을 정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노트에 적었다.

"10년 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데미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10년 안에 우리는 완전한 AGI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새로운 황금기를 열 것입니다. 새로운 르네상스죠."

에너지에서 건강까지, 모든 분야에서 그 혜택을 보게 될 거라고.

나는 25년째 R&D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10년 후면 35년 차가 된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과제 제안서를 검토하고, 평가회의에 참석하고, 예산을 배분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때쯤이면 AI가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나는 진짜 중요한 질문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어떤 문제가 정말 풀어야 할 문제인가?" "누가 이 문제를 10년간 고민해왔는가?" "이 연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PMP와 Agile을 공부하며 배운 게 있다. 프로세스는 도구일 뿐이고,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라는 것.

AI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AI는 더 나은 도구를 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금요일 오후, 유튜브 영상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 들어갈 때, 나는 조금 다른 질문들을 할 것이다.

"이 과제는 진짜 중요한 문제를 풀고 있나요?" "연구책임자는 이 문제를 얼마나 깊이 고민해왔나요?" "우리는 지금 안전한 길을 가고 있나요, 아니면 담대하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고 있나요?"

AI가 만든 세계를 걷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AI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 미래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다.


김현철
AI R&D 전략플래너
기계공학 박사, PMP & Agile 전문가

이 글은 2025년 10월 어느 주말, 한 R&D 기획자의 성찰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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