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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맛 아이스크림

도서관 밖으로 나온 그림책들

by 오모

여름이 되면 우리 동네 도서관의 그림책들은 청량한 햇살을 받으며 당당하게 도서관 밖으로 나온다.

겨울 내내 아늑한 어린이 열람실에서 열렸던 스토리타임은 파머스마켓이나 호수, 공원, 등대 앞으로 무대를 옮겼고 나와 아이는 그림책을 따라 숲으로 호수로 부지런히 밖에서 머물렀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열리는 스토리타임!

인구 2,500여 명이 전부인 이 도시에는 여름에만 마법처럼 문을 여는 작은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그 이름도 귀여운 <앞 베란다>.

실제로 가게 앞에는 베란다처럼 생긴 작은 야외공간이 있고 두 개의 그네벤치와 테이블, 의자가 놓여있다.

원래 이름은 세련된 <The Front Proch>이지만 나는 한국어로 직역한 <앞 베란다>라고 부르는걸 더 좋아한다. 앞 베란다는 어릴 적 우리 엄마가 고운 화초들을 가지런히 키우던 온실처럼 따사롭고 밝은 장소를 떠올리게 하니까.

미국의 아이스크림가게와 한국 오래된 아파트 앞 베란다는 이렇게 연결되어 한 사람의 그리움을 위로한다.

별것 아닌 것들에 위로받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해두자.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가족들이 야외그네와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고, 도서관 사서인 멜리사가 연노란색 캐리어에 담아 온 그림책과 블루투스 스피커, 비눗방울 기계를 막 꺼내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역시 야무지게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서.

멜리사를 봤을 때 미국 도서관 사서들은 거의 파티플래너나 레크리에이션 강사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는 늘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가방에 그림책과 각종 장비(?)들을 가득 싣고 유유히 동네를 돌아다니며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그 안에는 비눗방울 기계, 스티커, 바닥에 낙서할 분필세트, 손 인형처럼 동네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했다.


우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알록달록 스프링클이 뿌려진 ‘생일케이크 맛’ 콘을 들고 그네벤치에 앉았다.

여름의 햇볕을 타고 퐁퐁 터지는 비눗방울과 경쾌한 음악으로 스토리타임은 시작된다.

손과 얼굴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아이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는 아마 우리 동네 애들에겐 웬만한 아이돌보다 인기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멜리사가 만들어주는 달콤한 아이스크림맛 그림책을 먹었다.





그림책과 공간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왜 미국 도서관은 그림책을 도서관 밖으로 끌고 나오는 걸까?

적절한 공간에서 펼쳐진 그림책은 무한의 힘을 발휘한다.


그날 멜리사 사서가 선택한 그림책은 모 윌렘스의 <나눠먹을까 말까, Should I share My Ice Cream?>와 하이디 우드워드 셰필드의 <아이스크림 얼굴, Ice Cream Face>이라는 책이었다.

두권 모두 집에서 아이와 함께 읽은 적 있는 책이다.

아찔한 브레인 프리즈(뇌 동결)에 대한 경험, 최애 아이스크림 맛에 대해 도손도손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한 감정 없이 잔잔한 재미를 남기고 기억 깊은 곳으로 사라진 그런 책들에 마법사 멜리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쥐어 준’ 후 그림책을 펼침으로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그림책 표지만 봐도 그날의 바람, 햇빛, 비눗방울, 차가운 크림 덩어리의 감촉,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찐덕찐덕한 아이의 손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림책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어떤 그림책은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커다란 미시간호수의 빨간 등대 앞으로 우리를 불렀다. 사서는 아이들이 앉을 폭신한 패드를 준비해 두고 캠핑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여서 얼핏 그녀가 일하러 온 도서관의 사서가 아닌, 호수를 즐기러 온 관광객처럼 보일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듣는 갈매기의 모험담은(아쉽게도 책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호수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물풀과 이끼가 서로 손을 잡고 춤추는 듯한 호수의 물 냄새, 물방울을 머금은 바람의 촉감, 머리 위를 맴도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어우러져 4D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농장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며 넘치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발산하는 그림책도 있다.

지난 이른 봄, 마을의 작은 농장에 방문했을 때 마침 농장주인이 읽어주는 스토리타임을 들을 수 있었다.

포근한 인상의 주인이 안내해 준 작은 헛간에는 장난감, 토끼를 쓰다듬을 수 있는 토끼침대, 마른 옥수수 알갱이들이 쌓여있는 옥수수놀이터, 트랙터와 기다란 벤치가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차례로 벤치에 쭈뼛쭈뼛 앉자 활기 넘치는 농장 아주머니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의자에서 일으켜 작은 무대 위로 불러 세웠다.

그녀가 보여준 책은 산드라 보인턴의 <농장댄스!, Barnyard Dance!>.

농장 스토리타임에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림책이 있을까! 산드라 보인턴의 책들은 이미 도서관 스토리타임에 단골로 등장하기 때문에 미국 어린이들에게는 익숙한 책일 것이다. 그녀의 책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특히 영유아들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보는 책이다.

농장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발을 쿵쿵 구르며 <농장댄스>스토리타임을 시작했다.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과 소에게 인사하고 돼지와 함께, 아니, 친구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색했던 공기는 금세 순한 활기를 띄었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바탕 춤추고 에너지를 발산한 아이들은 차례로 줄을 지어 농장의 진짜 돼지와 진짜 소와 말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각각의 존엄한 생명이자 가족과 같은 농장 동물들의 특별한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셨다.

그것은 그림책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했던 농장 동물들을 아이들 눈앞에 실제로 데려오기에 완벽한 스토리타임이었다.


오늘도 도서관 밖에서 열일하는 그림책들을 나는 응원한다.

그림책이 있는 장소를 발견하면 기꺼이 그곳에 함께 머물면서.



<아이스크림 영어 그림책 목록>


Should I Share My Ice Cream?- Mo Willems


Ice Cream Face - Heidi Woodward Sheffield


I Love You More Than Ice Cream


Pete the Cat Screams for Ice 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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