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카페 부럽지가 않어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순전히 내가 사는 미국 시골마을엔 키즈카페가 없기 때문이었다.
키즈카페는커녕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눈뜨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미국 도서관은 어린이 열람실과 프로그램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기에, 키즈카페가 부럽지 않았다. 정말로.
무엇보다 번쩍이고 소리 나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기를 빼앗겨버리는 나는 키즈카페의 화려한 장난감과 아이들이 힘을 합쳐 뿜어내는 그 흥분되고 들뜬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도서관은 조용하고 따뜻한 환대와 편안함이 있다. 그곳에는 그림책과 함께 놓여도 이질감이 없는 퍼즐과 교구, 레고, 역할놀이를 할 수 있는 순한 물건들이 아이들을 기다린다. 반짝임도 없고 소리도 나지 않지만 몰입하고 상상하게 하는 물건들 말이다. 구강기를 지나는 아기들은 이런 물건들을 입에 넣거나 침을 묻히기도 하는데 사서가 달려와 주의를 주는 대신 센스 있게 <Yuck Bucket>이라고 쓰인 플라스틱 통이 이곳저곳에 놓아둔다. 직역하면 어이쿠 바구니랄까. 아기의 침이 묻어 촉촉해진(?) 장난감을 넣어두면 사서들이 깨끗하게 세척해서 다시 돌려놓는다. 뭐든지 입에 넣어 탐색하는 아기들의 발달과정을 고려한 다정하고 따뜻한 묘안인 것이다.
키즈카페에 다녀오는 날은 텅 빈 지갑과 함께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도서관에 다녀오는 날은 충만하고 평온했다. 도서관에서는 아이가 누리는 즐거움에 대한 시간당 이용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간식이나 음료를 사 먹지 않아도 되며, 장난감 같은 걸 팔지 않아서 좋았다. 새것 같은 중고책을 50센트에(약 690원)에 팔기는 하지만.
영어도 잘 못하고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인 나는 아이를 위해 세련된 ‘플레이 데이트’ 같은 걸 꾸려주지도 못했다. 대신 부지런히 도서관에 데려가 또래아이들 틈에 아이를 데려다 놓으면 자기들끼리 친구가 되어 잘 놀았고 덕분에 아웃사이더 엄마가 갖는 죄책감 같은걸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도서관 사서가 읽어주는 스토리타임을 듣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삼오삼오 모여 소꿉놀이를 한 다음 그림책을 잔뜩 골라 도서관 옆 놀이터에 들러 뛰어놀고 나면 소박하고 충실한 하루의 모양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매일매일 반복하고 싶은 이상적인 하루였고, 그래서 자주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동네 도서관은 나와 아이에게 더없이 행복하고 안락한 장소가 되어주었고, 그림책을 많이 읽었으며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 키즈카페 대신 도서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동네 도서관은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스토리타임 외에도 다양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내 기억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건, 작년 여름에 열렸던 인형친구들의 하룻밤 캠핑 <Stuffies Sleepaway Camp>. 자신이 아끼는 봉제인형을 하나씩 가지고 도서관에 모인 아이들은 봉제인형의 든든한 보호자로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내 아이가 고심 끝에 데려간 인형은 미국에 이민 왔을 때 처음 선물 받은 강아지인형, ‘비니부 도그’. 도서관 문 앞에는 사서 멜리사가 데려온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애착인형 “미스 무스”가 인형들을 반겼다. 귀여워라. 인형들은 보호자인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보고, 우정팔찌를 만들고, 낙하산 놀이를 한 다음, 인형 친구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에 남겨졌다. 아이는 도서관에 남겨질 비니부 도그를 걱정하면서도 응원했다. 내일 데리러 올게, 다른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놀아, 사랑해. 그날 비니부 도그는 씩씩하게 도서관에 남았다.
다음날 인형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더니 비니부 도그와 함께 얇은 책자가 딸려왔다. 책에는 도서관에서 캠프를 즐기는 인형들의 사진과 짧은 설명글이 실려있었다. 인형들이 도서관 정원에서 보물찾기 하는 모습, 둥글게 둘러앉아 스토리타임을 듣는 모습,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 그리고 침낭에 누워 잠드는 모습까지. 나는 그 밤에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남아 인형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사진을 찍고 인쇄해서 특별한 책으로 만들어준 사서들의 노고에 그만 감동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어린이들의 동심에 진심인 사람들이 있다니. 그건 경탄과 존경심 같은 감정이었다. 미국 도서관은 그런 곳이다. 꺾인 동심도 몽글몽글 되살아나고 무뎌진 상상력도 활기를 찾는 곳.
미국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읽고 싶은 그림책을 선택할 수 있고, 읽기 싫으면 책을 덮을 권리도 있으며, 좋아하는 피자 가게와 쿠키 맛을 선택할 수 있다. 그 모든 선택들은 응원받고 존중받는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연습할 수 있는 행사를 자주 연다. 그중 인기가 많은 것은 단연 간식을 동원한 <도서관 테스트 키친, Library Test Kitchen>. 로컬 식당과 프랜차이즈 피자점 5개 정도를 선정해 그곳에서 사 온 피자 조각을 한입씩 먹어보고 동네 최고의 피자가게 고르기(놀랍게도 작은 로컬식당이 피자헛을 이기고 우승했다!), 오레오 맛 테스트(미국에는 약 27가지의 오레오 맛이 있고 한정판까지 합하면 약 100가지의 맛이 있다.), 선호하는 베이글 맛 순위 정하기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그림책을 고르면서 성장과 함께 변화하는 취향과 사소한 실수들을 반복하며 자란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되는 거니까.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며 방황하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수학학원 대신 이런 도서관들이 많았다면 좀 더 스스로를 믿는 어른으로 자랐을까? 적어도 좋아하는 책의 취향정도는 확고히 다졌을 것 같다.
사계절은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틀이라서, 계절에 따라 그림책을 소개하고 계절놀이와 활동을 제공하는 것도 도서관의 몫이다.
봄에는 생화로 꽃꽂이를 하고 요정을 위한 정원을 만든다. 여름이 되면 도서관 옆 공원에서 버블파티를 즐기고 매끈한 돌멩이에 그림을 그린다. 가을은 가장 바쁜 시즌인데, 탐스럽게 자란 호박을 잔뜩 쌓아 두고서 <호박 꾸미기>로 예술혼을 불태우고, 핼러윈 전날에는 징그럽게 생긴 눈알젤리, 유령초콜릿, 피처럼 붉은 시럽, 지렁이젤리, 비스킷으로 유령의 집을 짓는다. 겨울에는 도서관에 모여 앉아 팝콘과 주스를 마시며 크리스마스 영화를 함께 보는 것으로 길고 추운 겨울을 아늑하게 보낸다. 덕분에 낯선 땅에서 지낸 열두 번의 계절은 어쩐지 한국에서 누렸던 것보다 훨씬 다채롭게 보냈다. 이곳에서 계절의 변화가 보여주는 면면과 자연은 아이들의 가장 훌륭한 놀잇감이 된다.
빠르고 자극적인 감각을 과잉제공하는 키즈카페보다는 감정과 상상력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도서관의 포근한 분위기가 내향적인 나의 육아스타일과 자연스럽게 맞닿아서 좋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도서관에서 새로 읽기 시작한 챕터북 <호텔 플라밍고> 시리즈를 읽으며 심심하고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낼 예정.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최신 장난감이나 교구가 아닌 심심하고 평온한 시간에 발휘된다. 외부의 자극이 적을 때, 내면의 자극이 작동하는 신비로운 현상이기에, 나는 아이가 상상하고 몰입할 수 있는 조금은 지루하고 자극이 적은 공간에 아이를 데려다 놓는다. 책이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곳. 키즈카페처럼 휘황찬란하고 멋진 장난감들이 정신을 빼앗는 곳에선 그림책이 반가울 리 없으니까.
도서관에서는 돌멩이와 호박 위에 그림을 그리다가 곁에서 조용히 눈을 맞추는 그림책의 세상에 빠져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계절을 지나던지, 어떤 즐거운 활동을 하던지 그곳에는 그림책이 늘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고, 아이들은 그렇게 책과 사랑에 빠진다.
키즈카페 대신 도서관에 가는 까닭이다.
굳이 우리나라의 도서관에 대해 덧붙이자면, 어린아이가 도서관에서 칭얼댄다고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고 주의를 주는 대신 어린이들이 마음 편하게 상상하고 몰입할 수 있는 공간과 그림책을 준비해 준다면 감사하겠다.(이 여자 뒤끝 있네…)
도서관 <인형들의 캠핑>에서 읽어줬던 캠핑그림책 목록
<S Is for S'mores: A Camping Alphabet>
<Summer Camp Critter Jit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