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월의 중반이 지났다.
9월의 아침 하늘은 맑고 푸르며 아침 공기가 여름과는 사뭇 다른 향기를 낸다.
여름에는 더워서 열지 못했던 베란다 창을 맘껏 열 수 있어 좋은 요즘.
우리 집은 오래된 아파트의 3층이다.
큰 키의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우리 집 창문 밖에서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찬란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이 나뭇잎들이 이 집을 계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봄에는 흐드러진 벚꽃이, 여름엔 푸르른 나뭇잎과 버찌가, 가을엔 노랗게 물드는 단풍잎이, 겨울엔 떨어진 낙엽으로 텅 빈 나뭇가지가.
4계절 멋지게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 준다.
나는 특히나 창문을 열어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솨아솨아- 파도소리 같으면서도 들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소리.
거기에 새들이 놀러 와 짹짹 노래 불러주면 그보다 더 좋은 음악소리도 없다.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고요한 적막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다. 그 이전부터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티비를 보지 않아도 무조건 티비를 틀어놨었는데, 요즘은 가만히 앉아 고요함을 즐긴다.
창문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날아가는 헬리콥터 소리, 택배 트럭이 문을 열고 짐을 옮기는 소리, 수레를 달달 끌고 가는 소리 등 누군가가 내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는 순간.
날씨가 추워지면 창문을 열어둘 수 없으니 선선한 가을날 마음껏 창문을 열어 여러 종류의 소리를 즐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와 창문을 열어두었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소리가 밀려들어온다.
가만히 앉아 바깥의 소리를 듣다가 오늘의 점심밥을 준비한다.
오늘의 메뉴는 단호박 수프.
벌써 며칠 전부터 해 먹으려고 마음먹었던 메뉴이다.
아빠가 기르신 단호박 두 개를 받아와 계속 방치하다가 얼른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정한 메뉴.
받아올 땐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니.
선선한 날씨에 후루룩 먹기 좋은 단호박 수프.
가을이 되면 단호박 수프가 떠오른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쌀쌀해진 날씨에 따듯한 국물이 생각나서 그런가?
만드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귀찮아서 자주 해 먹지 못하는 메뉴.
9월이 되고 가을이 왔다는 생각에 단호박 수프를 만들어 먹으려고 생크림도 벌써 주문해 놓았다.
이럴 때만 부지런해지는 나.
큼지막한 단호박을 벅벅 씻어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꼭지를 아래로 향하게 해서 익히면 더 잘 익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걸 다 돌린 후에 알았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단호박을 반으로 갈라 씨를 파낸다.
씨를 파내며 생각했다.
그래. 이 작업이 귀찮은 거였지.
아직 단호박이 뜨거웠지만 더 귀찮아지기 전에 움직이자.
후다닥 씨를 파고, 파낸 씨를 정리한다.
풍미를 더 좋게 하기 위해 냉장고에 있던 양파 반 개를 썰어 버터에 달달 볶아주었다.
윤기 있는 갈색이 된 양파 위에 껍질을 벗기고 깍둑썰기한 단호박을 넣어 잠시 함께 볶아주고는 싱크대 하부장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블렌더를 꺼냈다.
그린스무디를 열심히 만들어 먹던 시절에는 매일 사용했지만 지금은 싱크대 하부장에 잠자고 있는 블렌더.
돌리는 소리가 제법 크고 요란해 이게 층간 소음에 문제가 없을까? 생각하며 자주 쓰지 않게 된 물건이다.
볶던 양파와 단호박을 우유와 함께 블렌더에 넣어 갈아준다.
위잉 위잉 강력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블렌더.
30만 원이 넘는, 내 기준에서는 고가의 가전인데 소리는 더 작게 만들 수 없었을까.
단호박과 양파가 곱게 갈리면 다시 냄비에 부어 생크림을 넣어 조금 더 끓여준다.
그러고 나면 선선한 가을날 아주 잘 어울리는 단호박 수프가 완성된다.
샐러드용으로 오븐에 구운 단호박 한 조각을 한 그릇 가득 담은 단호박 위에 살포시 올려주고, 냉동실에 빵을 오븐에 돌려 함께 내어준다.
따뜻하고 든든한 오늘의 한 끼 완성.
오늘의 한 끼는 꽤나 고급스러운 느낌.
재료를 손질하고, 뒷정리를 하고, 요리를 하고.
나의 노고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간, 나만을 위한 한 끼가 이렇게 완성되었다.
결혼을 하고, 직접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알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가족들을 위해 요리까지 하다니.
그걸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받아먹었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울 지경.
만들어 주는 것이 당연하고 받아먹는 것이 당연했던 지난 삼십여 년,
그 긴 시간을 묵묵히 지내 온 우리 엄마.
그래서 그런지 우리 엄마는 요즘 혼자 밥을 먹을 땐 그렇다 할 반찬도 없이 채소와 된장만 놓고 먹는다고 한다.
조만간 엄마에게 내가 만든 사랑이 듬뿍 담긴 요리를 대접해야지.
선선한 가을날, 엄마를 초대해 창문 밖 단풍잎을 보며 가을의 맛 단호박 수프를 먹어야겠다.
단호박 수프 recipe
(단호박 약 400g 기준)
단호박을 깨끗이 씻어 전자레인지에 3-5분 돌린다.
그 사이 양파 1/2개를 썰어 버터에 볶아준다. (갈색빛이 날 때까지 볶아주면 ok.)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단호박은 반으로 갈라 씨를 파준다.
단호박을 눕혀 껍질을 칼로 잘라낸다.
볶아둔 양파에 단호박을 넣어 살짝 볶아주고, 블렌더에 갈아준다. (이때 우유 200ml을 같이 넣는다.)
곱게 갈린 단호박을 다시 냄비에 붓고 생크림 200ml을 넣어 조금 더 끓여준다.
끓이면서 기호에 맞게 소금을 넣는다. (난 치킨스톡도 조금 넣어주었다.)
그릇에 담아 맛있게 먹으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