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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의 프리즘 속 굴절된 꿈

김승하의 <나와 마을로 가는 열차/샤갈의 마을을 지나>

by 김승하

나와 마을로 가는 열차에 눈이 내립니다.

무중력 어둠 속, 차창에 달라붙는 진눈깨비처럼

비음의 기적 소리 낮게 낮게 가라앉고 있네요.

우울한 자기磁氣에 싸인 불빛, 어디쯤이었을까요.

유년의 오랜 기억 속 희미한 윤곽만 드러나는,

검은 크레파스로 그린 산과 강물이 지워지고

부풀은 수은등 불빛 풀어지고 있습니다.

사내의 크고 젖은 눈망울 흔들리던

흐린 차창의 간이역이었던가요, 흰 눈발 속

어지러운 나비 떼와 램프를 든 청동의 얼굴 스쳐 가고

얼어붙은 그리움 퍼내는 삽질 소리 들어요

비어 가는 저탄장貯炭場 감감한 내면인 채

쩍, 쩍,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 귀 기울입니다.

우리들 탄성의 대화가 침묵으로 바뀐 곳은

또 어디쯤이었던가요. 정정한 전나무 소나무 숲을 지나,

휘어진 청동 빛 가지마다 별빛 튕기는

푸른 잎새들의 희망, 지금 아득히 꽃이 되나요,

방울방울 눈물 지워져 새롭게 태어나는 걸까요.


의식의 등고선을 넘어 눈이 내립니다.

유년의 도화지처럼 조각조각 흩날리는 눈발들

언뜻언뜻 스쳐가는 진눈깨비 멎고

세월의 깊은 주름 패인 강줄기를 따라

깨어 있는 안개의 불빛 스쳐 가고 있습니다.

섬세한 감각으로 얼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차창의 물방울들, 깜빡이는 예감의 유도등

목각 인형처럼 도막 난 잠을 뒤척이며

토막 꿈 잘려 나가는 톱질 소리 들어요.

안개의 깊은 강을 건너 떠올리는 침묵의 기적 소리,

저마다 맞물려 돌아가는 육중한 쇠바퀴

아득한 소음에 실려 가고 있습니다.

차창의 프리즘 속 어디쯤인가 꺾여 있을 굴절된 꿈

원색의 꿈에 젖은 나 와 마을 떠올리며

안개에 싸인 따뜻한 불빛 안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마을로 가는 열차-샤갈의 마을을 지나> 전문

며칠 전 눈 내리는 날 소개할 만한 시가 어떤 시가 있을까 생각하다 20대인 1980년대 말에 썼던 나의 시 <나와 마을로 가는 열차-샤갈의 마을을 지나>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청량리역에서 동해시까지 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느꼈던 감정을 시로 옮긴 작품이다.

지금은 KTX 고속철도의 등장 이후 야간열차 운행이 모두 중단되었지만, 당시엔 영동 지방에서 서울로 여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태백선이다. 이 열차는 밤 11시쯤 출발하여 원주, 제천, 봉화, 태백, 도계, 동해, 강릉에 이르기까지 다음날 아침 새벽 6시 무렵까지 4개의 자방 자치도를 넘나드는 노선으로서 다양한 직업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기차다.


나는 어린 시절 광산촌인 철암, 도계, 태백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다. 태백시는 한때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이던 시절이 있었으나 80년대 이후 몰락하여 80년대 사북 광부 파업 사태, 그 후 탄광 지역 경제 활성화 목적으로 개설된 카지노 개설 등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 사람들의 굴곡진 삶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이다.


서울 강릉 간 KTX 고속철도가 개통되기 전 나는 눈 오는 겨울에 이 열차를 타면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나와 마을>에 그려진 푸른 얼굴의 사내를 떠올리곤 했다. 나는 차창을 통한 굴절된 프리즘으로 빛을 분해하듯 우리 사회의 굴곡지고 왜곡된 삶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2024.01.01/김승하시인/kimseo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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