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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Aug 18. 2024

운이 좋았지

연재를 마치며

운이 좋았지 - 권진아


나는 운이 좋았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이별을 한다는데


나는 운이 좋았지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던 사랑을 했으니까


나는 운이 좋았지 서서히 식어간 기억도
내게는 없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한없이 사랑한 날도
우리에겐 없던 것 같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스친 인연 모두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으니


후회는 하지 않아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참 많이도 아팠지
혼자서 울음을 삼킨 날도 정말 많았지


이젠 웃어 보일게 긴 터널이 다 지나가고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됐으니


아주 자잘한 후회나 여운도 내게 남겨 주지 않았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내 삶에서 나보다도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내게 불었던 바람들 중에 너는 가장 큰 폭풍이었기에
그 많던 비바람과 다가올 눈보라도 이제는 봄바람이 됐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나는 운이 좋았지
나는 운이 좋았지 넌 내게 전부였지


나는 운이 좋았지 내 삶에서 나보다도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https://youtu.be/oiBswnuvv80?si=PkKyvJQD7gDrdSic



 만약 지금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다면. 유치하고 무의미한 상상이지만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가정은 대개 지킬 것이 있거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경우 이뤄진다. 복에 겨울 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때, 별일 없는 일상의 무탈함에 젖어 있을 때 느닷없이 상실에 대한 걱정이 찾아온다. 빈털터리는 도둑이 들까봐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이십 대 후반 절망의 늪에 깊이 잠식되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날은 반복되었고 희망도, 잃을 것도 없다고 자조하고 말았다. 잃을 것이 없다면 모름지기 배수의 진을 치고 악으로라도 덤벼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조차 갖추지 못한 나는 발악보다는 훨 수월한 단념을 선택하고 말았다. 권태와 회의로 굳어진 타성은 삶에 대한 미련을 조금씩 앗아 갔다.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절망보다는 희망 쪽의 힘이 세다. 학창 시절 웬일인지 공부가 하고 싶어서(아주 드물게.) 책을 펴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깊이 몰입하게 되고 집중하는 재미에 푹 빠져 들게 된다. 그렇게 두 시간쯤 책상에 앉아 있었을까. 졸음이 몰려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시 여윈잠에 들었다. 하필 그 순간 방문을 연 엄마는 공부는 언제 하고 잠만 잘래, 왜 그렇게 의지가 약하니, 침은 또 왜 그렇게 많이 흘리니, 라고 일갈을 날렸다. 아이씨, 나 안 해. 순간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지, 나를 아끼는 마음, 장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따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책을 덮고 반항심을 표출하는 것이 억울한 마음을 위한 복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압적인 타의가 개입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의지가 꺾였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속에 흐르는 복수심, 괴로움, 분노는 수동적인 요소로 폭발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결국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이다. 타의에 의한 동기 부여보다는 자의에 의해 생성된 꿈과 기대, 희망 같은 것이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2년 넘게 고양이를 키우면서 느낀 만족감은 백 프로에 가깝다. 다시는 고양이가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평온하게 그르렁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곁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 수명이 다해 녀석들이 떠나 버린다면 상실의 아픔이 얼마나 클까.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별의 쓰라림은 쏟아부은 애정에 비례하는 법이다. 상상은 이제 이렇게 이어진다. 고양이와의 교감과 만족, 애정도 이 정도인데 만약 내 아이라면 어떠할까. 뽀얀 피부의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옆에 잠들어 있다. 성급하게도 그렇게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와의 이별부터 상상한다. 아내와 함께 첫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며 생긴 기대와 희망을 애써 모른 척했다. 자칫 실망할까봐 미리 대범하고 무심한 척 갑옷을 입었다. 방어 기제 덕분에 상처는 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임신에 대한 간절함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해서 여인상이 살아나기를 염원했던 피그말리온의 절박함이 우리에겐 없었다. 아침이면 아내의 배에 호르몬 주사를 놓았다. 어떤 날은 두 방씩이나 길고 가느다란 바늘을 꽂았다. 처음엔 미숙해서 피가 나기도 했다. 군데군데 피멍 자국이 생겼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주홍빛 멍울이 마음에도 새겨졌다. 아내는 주사가 아플 때면 내 머리끄덩이를 잡기도 했으나 힘든 내색 없이 잘 견뎌 주었다. 대견한 아내를 위해 추어탕과 포도, 소고기 따위를 먹였다. 아내의 체중은 그대로였는데 되레 나만 살이 붙었다. 고단백질이면서 따뜻한 성질의 음식이 배아 이식 후 착상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물릴 정도로 추어탕을 먹으며 어릴 적 논에서 잡던 미꾸라지의 요리법이 떠올랐다. 추어탕을 끓이기 위해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소쿠리에 넣고 굵은소금을 뿌렸다. 손으로 벅벅 문질러 헹구고 놔두면 진흙과 이물질을 뱉어내고 끈끈한 진액을 내뿜었다. 그 잔혹한 관경을 목도하고 나서부터 추어탕을 입에 댈 수 없었다. 된장과 들깨가루가 들어간 으른 입맛이 싫기도 했지만.(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쉴 새 없이 진흙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사람의 손아귀 안에서도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미끈함과 탄력이 미꾸라지에겐 있었다. 소쿠리 안에서 소금을 맞으며 몸부림치던 모습이 마치 나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일었다.


 멋 모르고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는데 내내 글을 올리는 것이 버거웠다. 연재라는 장치가 책임감을 발동해 쓰기의 동력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쓰고자 하는 마음을 먹기 힘들었다. 생각을 시작하면 불안과 걱정이 미꾸라지처럼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발을 붙였다. 바보 천치처럼 꺼벙하게 누워 오로지 휴식만을 갈구했다. 물론 쉬는 동안에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복수하고자 하는 자는 두 개의 무덤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의 무덤뿐 아니라 내 무덤도 필요하다는 말은 결국 복수에는 나 자신도 버릴 각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의 현상을 보고도 그 안에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발견한다. 컵 안에 반쯤 담긴 물을 보고 많음과 적음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 나태하고 수동적인 나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긍정을 쓸지, 부정을 사용할지는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착한 개와 나쁜 개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에 대한 정답은 평소에 먹이를 더 많이 주는 개라는 말이 있다. 실패에 대해 수긍할 준비, 현상의 긍정을 발견할 수 있는 훈련을 더 해야 한다. 다만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대해서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에겐 그만큼 후회도 여운도 남지 않는 법이다. 혹시 상처받더라도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아내에게도, 어쩌면 언젠가 만나게 될, 아니면 영영 보지 못할 아이에게도 마땅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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