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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람들은 왜 거울을 무덤에 넣었을까?

김지운

  사람의 인생사는 얼굴에 드러나고, 그러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품이기도 합니다. 거울의 기원에 대해서는 감(鑒)기원과 양수(陽燧)기원이 있습니다. (鑒)기원은 대야에 물을 담으면 형상이 비춰지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청동 대야에 물이 없어도 모습이 비치는 것에서 거울이 탄생했다고 보는 설입니다. 양수(陽燧)기원은 신이적(神異的)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발화구인 양수(陽燧)와 태양을 상징하는 것에서 거울의 기원을 찾은 것입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 지을 순 없고, 거울의 용도가 사물을 비추는 생활 용구이자, 신이적 상징물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거울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청동기시대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으로 만든 동경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이후 삼국, 통일신라, 고려 시대까지 동경으로 이어지다 조선 시대에 유리 거울이 들어온 후에도 일부 무덤에서 확인되는 양상으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동경의 용도는 청동기시대에서 고려 시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동경의 용도는 빛을 반사하거나 물체를 비추는, 신이적(神異的) 측면과 실용적(實用的) 측면의 두 가지 기능 가졌는데, 이 기능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동경은 거울 면을 보더라도 형상을 뚜렷하게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신이적 측면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청동기시대의 동경은 용도와 성격 면에서 제사장의 신물(神物)로써 신분 상징물이자 의기(儀器)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경의 기능은 점차 실용성이 강조되어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로 들어오면서 화장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려 동경은 화장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수은을 입혀 형상이 잘 비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동경에 대한 연구에서는 완전한 화장구로 정착되었다기보다, 화장구 이상의 생활 기물로 주목하여 동경이 처음 등장한 이후 약간씩의 용도 변화와 수반되는 의미 변화는 거쳐 왔으나, 제의적, 신이적 상징성을 담은 특별한 기물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무덤에 동경이 부장되는데, 이는 거울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 고려국조가 새겨진 거울

    모든 무덤은 아니지만 고려 시대 무덤에서도 동경이 출토되고 있고 출토 양상 역시 벽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청동기시대의 동경은 피장자의 머리, 가슴 부위를 중심으로 출토되어 벽사적 의미를 담아 부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피장자의 머리, 가슴 부위에 동경이 매납되는 양상은 고려 분묘에서도 86.3%를 차지해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관 내부에서도 식기류(병, 발, 접시, 대접, 장군, 합, 수저 등)와 비식기류(명기, 가위, 방울, 동곳, 동전, 구슬 등)와 동경을 구분시켜 부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장할 때, 벽에 세우거나, 머리, 가슴 부위에 동경의 거울면이 피장자의 얼굴을 향하도록 하는 양상은 장의적인 성격과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동경의 배면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 문양도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국화, 운학, 등 동식물을 표현한 문양뿐만 아니라 글자를 새긴 문자경도 있습니다. 그중 불교와 관련된 글자를 적은 경을 범자문경이라 합니다. 범자문경 중에서도 산스크리트어로 “옴 마니 반메 훔”이란 글자를 암파계타나마(闇婆計陀那摩) 또는 암박계담납막(唵縛鷄淡納莫)로 여섯 자 육자진언을 새긴 거울이 부장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자진언의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아! 연꽃의 보주시여 (생노병사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멸해주소서”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자진언을 새긴 거울을 죽은 자의 공간에 부장하여 생노병사의 고통이 되는 업을 멸하고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불교식 내세관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고려 동경은 화장기술의 발달로 생활 용구로 사용된 것은 맞으나, 무덤에 부장될 때는 제의적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에서 거울은 신이적 상징물로 등장하였고, 이러한 성격이 고려, 더 나아가 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 고려 동경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수량이 2000여점으로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전체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 나오고, 문양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만큼 이전 시대보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고, 금속공예 기술과 예술성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러한 거울을 계속 사용하고 후대에 물려주는 경우도 많지만, 무덤에 부장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거울에 의례적 성격을 부여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앞으로 박물관 전시에서 동경을 본다면, 단순히 현대의 거울과 같게 보는 것이 아닌, 문양에 담긴 의미까지 유추하면서 상상을 펼쳐보는 것이 어떨까요?


▲ “옴 마니 반메 훔”을 唵麽抳鉢銘吽로 새긴 거울










※ 이 글은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전공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대중고고학연구회에서 발행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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