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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존엄, 그리고 마지막 선택

by 신아르케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인생의 필연이다. 나 역시 살아오며 이 주제에 대해 간헐적으로 사유해 왔고,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의 주머니’가 하나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아직은 그것이 내 일이 아닌 듯 여겨진다. 죽음은 반드시 오지만, 아직은 멀리 있는 손님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흔히 부정적이고 두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장례식조차 죽음을 애써 외면한 채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르기 전 겪게 될 노화와 신체적 고통이 두렵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고통이다.

나는 신체적 고통을 선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과 영혼을 더 깊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끌어내린다. 독한 감기로 신음할 때조차 쌓아온 지혜와 이성은 무력해지고, 오로지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만이 남는다. 고통 속에서는 고차원적인 사유조차 불가능하다. 다만, 고통의 긍정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숙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극심한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만약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안락사와 조력사망 논의가 다루는 핵심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존엄을 지키며 떠나고 싶다. 차갑고 무의미한 연명치료 속에서 고통만을 이어가는 삶보다는, 감사와 회개의 고백으로 삶을 정리하며 조용히 이별하고 싶다.

물론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 바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적·윤리적 논의, 법적 제도, 가족의 정서적 부담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결국 각자의 신념과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신 앞에서 평가받을 것이며,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성취와 지혜조차 마지막 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함 속에서 우리는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지를 죽음은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삶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다져 나가고자 한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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