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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요가강사로서의 삶(2)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매번 선생님과 함께 하는 수업 전 10분 명상하려고 수업에 와요.”


너무 의외였다. 그것은 플라잉요가 시간이었다. 보통 플라잉요가는 재미와 자극으로 가득 차 있는 수업으로 정적인 흐름을 선호하지 않는 회원들에게 적합한 수업이었다. 실제로 매트 요가보다 여러 서커스 동작을 시도하고, 해먹에 매달려 아등바등 대는 자신이 “오늘 선녀자세를 해냈어!”라는 성취감으로 수업에 참여한다.


그런데 명상하려고 플라잉 수업에 오다니! 나는 그 센터에서는 플라잉요가 전문강사였다. 나의 수업을 들으려면 플라잉요가에 참여해야 하는데, 해먹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찾는 것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요가지도자로 자리매김해야 할까?


지도자가 되고 끊임없이 스스로 하는 질문이었다.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일까, 20대 초반부터 강사생활을 지내 온 선생님들의 노련함과 다르게 내가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지도하는 것 외에는 나는 다른 강사들과 무엇이 다를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만 했다.


요가 지도자로서의 삶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는 달랐던 것은, 내 출신만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명상하고, 수련하고, 공부하고, 성실할 것. 마음이 조급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저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딛으며,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할 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진심이 통한 것일까? 누군가 쉬는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선생님은 공부를 정말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나의 수업 구성은 “짧은 나눔-5분 명상-아사나 수련“이었다. 그런 짧은 나눔 속에서 공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들켜버리다니, 살짝 부끄러웠다. 무엇이 부끄럽냐고 물어보겠지만, 5분의 짧은 나눔 속 나의 전체를 들켜버린 듯한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회원님들께서 만들어 주신 나의 정체성임을 자각했다.


오늘 나눔 한 책 제목을 물어본다든가, 괜찮은 명상 유튜브를 물어본다든가, 회원님들이 나에게 하는 질문은 “명상과 공부”였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깊게 공부하는 것, 꾸준한 명상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요가 커리어를 돌이켜 보면,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 대단한 목표를 향해 계획을 세운다든가, 지향점을 향해 도장 깨기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는 어떻게 커리어를 쌓아가지?”라는 질문을 품에 안고 있다면, 지금하고 있는 그 질문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때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더라도--당신의 커리어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차근차근 만들어져 간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조급할 때 한 호흡 크게 들이 마시고, 그저 내 쉬어 본다.

불안하다면 불안함을 인지하고, 나 자신을 감싸 안아 준다.

짜증이 올라온다면, 짜증을 바라보고,

환희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에 흠뻑 젖어본다.

그리고, 그뿐임을 자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라는 길에서, ‘나’는 ‘나’를 바라볼 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국제정치학도에서 요가지도자로 가는 갈랫길에서 느꼈던 가장 큰 깨달음이다.


내가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딛고 바라보는 것.jpg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딛고 바라보는 것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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