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기억하는 일'
기억하는 일
박준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에요 이런 집이 동네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래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내 큰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보름 생이야 이놈은 내 증손주야 작년 가을에 봤지 귤도 좀 들어 난 시어서 잘 못 먹어 젊어서 먹어야지 늙으면 맛도 없지 뭐 젊어서도 맛나고 늙어서도 맛난 게 있는데 그게 담배야 담배, 담배는 이 나이 먹어도 똑같긴 한데 재작년부터 기침이 끓어서 요즘은 그것도 못 피우지 참다 참다 힘들다 싶으면 불은 안 붙이고 물고만 있어 그런데 서기 양반은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는 노인네가 뭐 예쁘다고 자꾸 보러 온대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출처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22.
기억하는 일. 명자네 할머니는 사복 입은 군인에게 속았던 일을 기필코! 잊었나 보다. 그러니 그 상처가 있었어도 사복입은 구청 직원만 만나면, 졸졸 기억을 수놓는 것이지. 가장 잊고 싶었던 아픔이었던 게 틀림없다.
박준 시인의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둘러보다가, 얼마 전에 엄마한테 들었던 친구 이야기가 생각났다.
치매를 앓고 몸져누운 팔십 남편이, 죽어도 요양원에 안 간다고 화를 낸다던. 아픈 몸으로 더는 남편의 간병이 어려워지자, 그 집 큰아들이 사표를 쓰고 내려와서 함께 지낸다고 했다. 직장이 없으니 결혼도 먼 이야기고, 날마다 그렇게 야위어 간다고. 그런 아들이 안쓰럽고, 남편의 고집이 야속하다면서, 친구가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고 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니 아팠다.
옆에서 고민을 듣고 있던, 몇 년 전에 남편을 먼저 보낸, 다른 친구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요양원을 죽어도 안 간다고 하면, 우선 요양병원으로 가.
그러면 치료하다가 때 되면..."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 아픈 조언이었다. 결국 그분은 요양원으로 모셔지겠지... 가장 지독한 병이 '간병'이니.
명자네 할머니도 요양원에 보내질까 무서워서 마지막 정신을 부여잡으신 걸까?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요양원 가는 앰뷸런스에 탈까 무서워서... 사실 간병인을 집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인데... 아픈 할머니가 그 내막을 어찌 알까? 이민 가서 인연 끊은 상호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내 아들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기원을 읊조리셨다.
괜찮은 척해도, 정작 남편 잃은 사연은 잊으니.
기억하는 일이 이렇게 아쉬울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