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한 월급쟁이 인생이다 보니, 벌이가 한정적입니다.
나라에서 해주는 건 별로 없는데, 세금은 왜 이렇게 칼같이 떼 가는지요.
이렇게 벌어서 FIRE 족이 되어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쟁취하기는 커녕, 제발 정년까지 날 자르지 말고 월급 받고 다니게 해 주세요 하며 오늘도 아침에 눈 뜨면 출근하고 시키는 일을 하면서 눈칫밥을 먹습니다.
빚 갚고 세금 내고 생활비 쓰고 하다 보면, 통장 잔고는 늘 빈곤합니다. 마이너스 통장 끝까지 쓰는 인생은 아니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엔 카드 돌려 막으며 빚 독촉 받고 파산 회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괜찮은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도 먹고 세상은 이렇게 변해가는데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체력이 받쳐줄지, 건강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임금 피크제를 맞아 임피 사원이 되면 그때도 다닐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회사는 그때까지 안 망하고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을까요? AI 때문에 사람들이 필요 없게 되진 않을까요?
불안한 미래에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처음엔 로또를 했습니다.
대박 인생을 꿈 꾸며, 처음엔 몇천 원, 나중에 몇 만 원어치 그 이상도 해보았지요.
여행 간다는 핑계로 전국의 로또 명당을 찾아 다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 로또가 50억 짜리면 어떡하지 하며 당첨금으로 뭘 할지 고민했습니다.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아님 한량 생활을 하려나요? 아니, 그래도 회사는 사회생활도 하고 퍼지지 않으려고 취미생활 격으로 다니긴 해야 할까요?
행복한 상상은 늘 여지없이 깨집니다. 그렇게 많이 했는데 제일 잘 된 게 4등 5만 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다시 로또를 샀지요. 그렇게 한동안 삽질을 하다 깨달았습니다.
로또 1등은 진짜 마른 하늘에 벼락 맞을 확률이고, 로또 명당은 그냥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사다 보니 당첨 확률이 높아졌을 뿐이란 걸요.
그러다 같이 로또를 한 친구가 재미있는 곳에 놀러 가자고 해서 갔더니 도박 하우스였습니다.
고스톱부터 섰다 등을 하는 곳이었지요. 자욱한 담배 연기와 찌든 사람들.
잠시도 있기 싫었던 그곳에서 저는 어느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밤새 화투장을 들고 있었어요.
계속 있으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택시 기사 분들이 많으셨어요.
늘 고만고만한 벌이에, 사납금. 몸으로 일해야 해서 앞이 안 보여, 남는 시간에 여기에 온다고 하시더군요. 심심풀이도 되고, 어떤 분은 살아있는 걸 느끼고 몰입하는 유일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나이트클럽에 유치원 선생님들이나 간호사 분들이 아이들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와 병원에서 일하면서 생긴 스트레스를 풀러 많이 오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심심해서 온 주부들도 계셨고, 점잖은 교수님도 있으셨습니다. 물론, 저 같은 직장인도 많았지요. 자영업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처음엔 제가 도박에 재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엄청 땄습니다.
기세를 타면 제가 또 한가닥 하거든요.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한 달 치 월급을 따니까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판돈을 올렸지요. 1년 치 연봉을 땄습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털고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기세를 잡았을 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딴 1년 치 연봉을 다시 다 잃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도 좀처럼 잘 따지지가 않았습니다.
시간은 새벽인데 몸은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고 그렇게 싫어하던 담배 냄새도 개의치 않고 계속 도박을 했습니다. 판돈을 키우기 위해 돈을 빌렸습니다. 결국 올인이 되고 1년 치 연봉이 넘는 빚만 남았습니다.
계속 판을 키우고 몰빵을 하는데, 100번을 이겨도 한번 지면 다 잃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매번 이길 수는 없는 게임이지요. 상대가 있는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저 같은 초짜가, 온갖 기술을 쓰고 이 판에서 잔뼈가 굵은 타짜들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렇게 다 잃고 나니 이 판의 생리가 그제서야 읽히고 주변이 보였습니다.
그러고도 돈이 있다면, 아니, 빌릴 수만 있다면 다시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진정한 겜블러, 사실은 도박 중독이란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야, 좀 일어나 봐."
"어, 어"
"너 돈 있냐? 나 좀 빌려줘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친구가 잠든 나를 깨웠습니다.
1년 치 연봉만큼의 빚은 다행히 꿈이었지요.
술, 담배, 도박, 마약, (나쁜) 여자가 남자 인생을 망치는 주요 요소라고 무슨 주문처럼 외우고 다녀서 그런지,
도박이라면 바로 손사래부터 쳤습니다.
"난 안가."
"그냥 가서 100불 가지고 놀면 돼. 다들 가는데 같이 가자고.
호텔이라 깨끗하고 음식도 싸고 맛있어."
그렇게 다들 가니까 끌려가서도 게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카지노 호텔 음식이 싸고 맛있긴 하더군요.
꿈 속 하우스는 지저분하기 그지 없었는데, 이곳은 마치 천국과 같았습니다.
깨끗하고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
"이것도 결국 여기 와서 게임하고 돈 잃으라는 거잖아.
많이 잃으면 호텔 방도 잡아준다며?
그냥 도박 안 하고 더 큰 돈 안 잃고 그 돈으로 호텔 방 잡고 자는 게 낫지 않아?"
이런 말은 친구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 새끼 남자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거기서 남자가 왜 나와?
당장 사우나 가자. 보나 마나 나보다 좀만 한 게.'
그런 남자 운운에 당할 제가 아니었지요. 원래 잘 생긴 사람에게 너 못 생겼다고 하면 콧방귀도 뀌지 않지 않습니까?
돈이 없지, 자존감은 높은 인간이라,
"사내 자식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놀고 싶으면 혼자 가서 실컷 놀고 와라.
난 그냥 여기 있을 테니까."
도박과 보증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라 개무시하고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고 와인도 한잔 하며,
준비해 간 책도 보고 휴대폰 놀이도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잠들었나 봅니다.
남자 운운하던 녀석은 이미 가져온 돈을 다 잃었는지,
와인에 취해 곤히 자고 있는 저를 깨워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걸 보면 이미 반 미친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지만,
술에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로 술 취한 사람들을 보면 다 비틀비틀 헤롱거리는 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아이고, 이 미친 놈. 완전히 맛이 갔네.
이 놈을 어떻게 달래서 정신 차리게 하고 숙소로 돌아가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상한,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다행히 돈도 혹시 몰라 돌아갈 택시비와 밥값에 보탤 돈만 들고 와서 보여줬더니 녀석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녀석의 속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18, 그 코딱지 같은 돈으로 무슨 게임을 해.'
'그래, 그만 포기하고 집에 가서 발 닦고 니 코나 파라 ㅎㅎㅎ 시원하게 ㅋ 그리고 잠이나 주무세요.‘
그렇게 패배자들과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김없이 과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 좀만 더 했으면 됐는데.
전에 하루 저녁에 세 달 치 월급을 땄다구. 내가!"
"아이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누적 총 얼마 따셨는데?"
"그건..."
뻔한 것 아니겠나. 마이너스지.
몇 번 크게 딴 기억에 미쳐서 계속 하는거지, 냉정하게 따져보면 대부분 마이너스지요.
정말 타짜 정도의 실력과 미친 자제력으로 적당히 땄을 때 딱 끊고 일어나야 그나마 플러스인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좋게 말해 10%, 엄격하게 말하면 1% 정도라고 봅니다.
나머지 90%에서 99%의 인간들이 잃어주니 카지노가 그렇게 번창하는 거겠지요.
A와 B가 내기 당구를 치면 누가 돈을 벌까요? 무조건 당구장 주인이 돈을 벌게 되어 있습니다.
도박도 안 해본 제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고요?
TV나 드라마 올인 같은 거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구요?
다음 이야기에서 왜 제가 그렇게 잘 알고 확신하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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