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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플래너 Dec 08. 2022

건축기사 에피소드

no.2 수박화채를 들고 온 아가씨들

룸 싸롱이라는 술집은 접대부 아가씨들을 옆에 끼고 섹시하면서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룸 안에서 노래도 부르며 춤도 추고 술을 마시는 값비싼 술집이다. 술값이 작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몇 백만 원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인 월급쟁이들이 자기 돈을 써가며 롬 싸롱을 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건설 현장은 조금 다르다. 내가 근무하던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업체한테 접대를 받거나 공사 발주처의 관리 감독관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두 번은 갔었던 것 같다. 건설회사에서 현장 기술직으로 근무하는 경우 자신의 집 근처 지역에 근무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서울에 집이 있는 필자는 15년 근무기간 동안 딱 한 번 서울 현장에서 근무한 게 전부다. 거의 신축 공사 현장이 있는 타 지역에서 숙소 생활을 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미혼 총각의 건축 기사들은 은근히 회식이 있는 날이면 도우미가 있는 노래방이나 룸 싸롱으로 2차 술자리를 기대한다. 나도 신입 기사였을 때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튼 내가 공사 과장으로 근무하던 제주도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의 이야기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현장의 경우 공사 파트와 공무 파트가 나누어져 있으며, 설비와 전기를 제외하고 건축 담당 직원들의 숫자도 10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각 공정별로 협력 업체의 수도 마감공사에 들어가면 10개가 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있는 기성 청구를 위해 협력업체의 본사 이사급이나 대표가 직접 현장에 방문하게 되는데 이렇게 현장에 방문하는 날이면 현장 직원들에게 접대를 겸한 회식을 하는 날이 많았다. 또한 발주처 감독관들을 접대하는 일은 현장 소장님과 공사 과장, 공무 과장이 거의 도맡아서 참석하였다. 이렇게 잦은 술자리를 하다 보면 단골 술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제주도 아파트 현장의 경우 공무 과장이 자주 찾고 좋아하는 룸 싸롱 술집이 있었다. 나도 한 두 차례 억지로 붙잡혀서 간 적은 있으나 주사(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가 있는 공무 과장의 술버릇 때문에 분위기만 맞혀주고 술에 취한 척 먼저 술집을 나와 숙소로 들어가곤 했다. 그 술집의 마담은 나이가 50대로 보였으며, 손톱과 발톱에는 새빨간 매니큐어를 발랐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공무 과장과 같은 동향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공무 과장에게 들어보니 같은 고향 사람이라 누나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하였다나 모라나. 


룸 싸롱의 마케팅 영업 방법 중에 하나는 마담이 아가씨들과 함께 단골손님이 있는 사무실에 방문하여 간식을 주거나 골프 부킹을 하거나 점심 식사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다. 건설 현장 단골 고객의 경우 대부분 마담이 아가씨들과 방문하여 간식(김밥, 떡볶이, 순대, 떡, 토스트 등)을 제공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웃픈 현실적인 에피소드가 탄생한 날은 제주도의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 오전 10시쯤에 갑작스레 본사에서 건축 본부장님이 우리 현장에 점검차 방문하였다. 방문한 날이 금요일이라 현장 점검을 겸해서 가족들과 주말에 제주도로 여행을 온 것이다. 제주도의 여름 현장은 말 그대로 가마솥이다. 특히 골조 공사가 진행 중인 여름의 건설 현장은 그야말로 현장 전체가 사우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8월에 체감 온도가 40도가 넘어가는 날은 현장을 한 바퀴 돌 다 오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시큼한 체취가 해안가 바람을 타고 정신을 어지럽힐 정도였다. 나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만나 옆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아래 직원 녀석은 가슴과 등 쪽에 뿌옇게 소금기가 올라 마치 추상화를 그린 프린팅 티셔츠로 보였다. 


현장에서 발주처인 LH 건축 감독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순간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현장 사무실 앞에 하얀색 카니발 한 대가 도착하더니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50대 여인과 미니스커트와 가슴골이 파인 야한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들 한 무더기가 우리 현장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여직원이 나와 누구시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멀리서도 보였고, 새빨간 매니큐어의 여자가 큰 소리로 공무 과장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나는 현장 사무실 유리창을 통하여 안에 있는 본부장님을 보았고 기절할 정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악!' 본부장님이 사무실 중앙에 앉아 있는데 룸 싸롱 마담이 공무 과장의 이름을 간드러지게 부르면서 야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과 수박화채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일단 사무실 내의 분위기가 너무 궁금하여 5분 정도 더운 땡볕에서 기다리다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당당하게 들어갔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룸 싸롱 마담이 본부장님에게 수박화채를 그릇에 담아 건네주고 있었고 나머지 아가씨들은 다른 직원들에게 줄려고 그릇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공무 과장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마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잠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온 마담은 허겁지겁 아가씨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도망치듯이 헐레벌떡 빠져나갔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수박화채를 다 먹은 본부장님은 공무 과장에게 말했다. "이 새끼 현장에서 일은 안 하고 술만 마시러 다니냐? 술 좀 줄이고 현장에 신경 써라. 화채는 맛있게 잘 먹었다. 썩을 놈" 아마 본인도 기사, 대리, 과장 시절에 겪어본 일이라 다 이해했을 것이다. ㅋㅋ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본부장님이 현장에 방문한 날 술집 마담이 현장 사무실에 찾아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지금도 그때의 공무 과장 얼굴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그치질 않는다. 본부장님이 가족들과 함께 현장 사무실에서 사라지고 나서 공무 과장이 친하게 지내고자 했던 마담 누나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입에 거품을 물면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다음 날 현장 소장에게 공무 과장은 마담에게 퍼부은 것보다 몇 배의 폭탄을 맞았다. 아마 지금 건설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건축 기사로 근무하던 천안 현장에서는 아파트 레미콘을 타설 할 때 레미콘 영업 직원이 근처 다방에서 커피를 시키면 다방 레지라는 여자가 스쿠터를 타고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와 맥심 커피와 설탕, 프림을 기호에 맞게 섞은 믹스커피를 마셨다.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직원들 휴식을 위한 휴게 공간과 탕비실이 있어서 입맛에 맞게 원두커피까지 마시시만 내가 건축 기사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다방 레지라는 아가씨가 현장 사무실에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날락하였다. 어쨌든 그날 이후 제주도 현장에서는 룸 싸롱 아가씨들이 주는 간식을 구경할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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