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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의 우연

by 엄살

오랜만에 엄마와 여동생을 만나는 날이다.

오후의 재택근무 핑계로 오전의 약속들을 대부분 집 근처에서 잡는다.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는 여동생의 말에 집 근처 브런치가게를 검색하고, 지도를 보냈다. 친정식구들도 나 같은 뚜벅이 생활자들이라 마을버스를 타고 올 것이라 예상했다. 난 약속 시간 전에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오늘까지 대출해야 할 책들이 있어, 약속시간 30분 전에 집을 나와 한울 도서관으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저만치 도서관이 보이고 머릿속으로 대출할 책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는데, 순간 횡단보도 맞은편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엄마와 여동생이 어디서 뿅 나타난 듯 그곳에 있었다. 자주 가던 도서관을 배경으로 익숙한 두 사람이 앞에 있는 풍경은 상상외의 조합이라 잠시 멍해졌다. 평소 도서관에 갈 일이 없다는 친정 식구들인데, 더구나 우리 동네 도서관 앞이라니.


난 6차선 도로 맞은편에서 그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나만큼 놀란 표정의 동생에게 급히 전화를 해 "신호 바뀌어도 길 건너지 말고 그냥 서 있어."라고 한 뒤 도서관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검색해 보니 버스 타고 오기도 애매해서 그냥 걸어왔지. 생각보다 가깝던데?"

역시 뚜벅이들은 걷는 스케일이 다르군. 못 걸어올 거리는 아니지. 새삼 친정과 우리 집이 이 정도 가까운 거리라는 걸 상기했다.

"나 도서관에 잠깐 볼 일 있는데, 같이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을래?"

"그래, 어서 일 봐."

"응, 그리고 우리 동네 말고 이 근처 브런치 카페로 가자"

둘은 우리 동네까지 가지 않고 근처로 간다니 기뻐했다. 온 만큼만 걸어서 돌아가면 되니 뚜벅이들에겐 소소한 기쁨의 순간!


도서관에서 언덕을 넘어 공원길을 10분만 걸어가면 카페거리였다.

"어, 여기? 전에 산책하면서 와봤던 동네야."

두 사람은 이곳에 와본 적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럼 이따가 집에 갈 때 저쪽 길로 쭉 내려가서 큰길 따라가면 되겠다."

내가 아는 길을 두 사람이 안다는 게 신기하다.

도서관을 거쳐 브런치가게를 다시 검색해 찾아갔음에도 우리의 약속시간이 아직 안 되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선 각자의 바지런함이 우연히 도서관이라는 중간에서 만나 지다니. 만약 길이 조금만 엇갈렸어도 이런 이벤트 없이 약속된 그곳에서 만났을 텐데,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을 떤 게 너무 잘했다 싶었다.





며칠 후, 오후 재택근무 중 살짝 빠져나온 난 자전거 페달을 조금 급하게 밟으면서 또 한울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다. 오늘까지 꼭 반납해야 되는 책이 있어서였다. 오전엔 분명히 비가 오고 흐렸었는데 지금은 적당히 해가 나온 게 오늘 운동장에서 종일 체육대회하는 첫째와 둘째에게 딱 좋은 날씨였다.

'어? 아이들이랑 가끔 들렀던 편의점은 결국 문을 닫았네?'

잠깐의 외출이 주는 설렘이 좋아서 도서관이 가까워질수록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페달 밟는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저만치 도서관이 보인다. 확실히 엊그제보다 더워졌다. 어깨에 둘렀던 니트를 풀어 허리에 묶고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빨라졌다. 페달을 빠르게 밟으며 집 근처로 돌아오니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절로 났다. 중학교 아이들이 하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첫째와 둘째에게 차례로 전화를 했다.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는 계획이었는데, 둘 다 전원이 꺼져있다. 잠깐 기다려볼까 하다가 빠르게 포기하고 집으로 향한다.


얼마 지나자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빠삐코를 하나씩 들고 있다. 체육대회날이라고 학교에서 끝나고 받았단다.

'ㅎㅎ 엄마의 아이스크림은 나중에~'


그날밤 첫째와 필라테스센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녀석이 느닷없이 "엄마, 설레임이 먹고 싶어요." 한다. 마침 저만치 친구가 걸어간다며 뛰어가 데리고 왔다.

"너희들 아이스크림 사줄게. 먹고 편하게 얘기하다가 들어와."

오늘의 아이스크림은 첫째와 친구의 몫이었나 보다.


발로 땅을 혹은 페달을 밟고 다니는 느리지만 심장이 빨리 뛸 만큼은 움직이는 뚜벅이의 삶에서 이런 우연들이 한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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