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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히치하이킹 이야기

by 엄살

우리 집도 1997년 IMF의 직격탄을 맞았다.


97학번이라는 대학 새내기 딱지를 붙인 직후였는데 집안 분위기는, 아니 부모님 사이에 감도는 아우라가 심각했다. 자식들 걱정시킬까 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으셨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은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학교를 안산까지 다녀야 하니 매일 필요한 교통비와 밥값이 없어서 아침마다 부모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했다. 용돈을 달라고 하는 게 죄송스러워 아껴보겠다고 지하철 패스를 끊었다가 멜빵바지를 입은 날 좌식화장실에서 앞 주머니에 넣어둔 소중한 패스를 홀라당 빠뜨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밥은 대부분 학생식당에서 해결했는데, 싸구려 냉동식품을 데운 게 너무 확실한 떡만둣국이 가장 싸서 자주 먹었다. 돈가스나 다른 메뉴도 맛없기는 비슷비슷했다. 그나마 경기외곽 신도시에 살 때는 집에서 3분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왕복 4시간이라도 다닐 만했다.


2년 후 우리 집은 외삼촌의 사업 실패로 헐값에 넘어갔고, 신도시에서 꽤 떨어진 외곽의 반지하집으로 이사를 갔다. 난 대학생, 동생들은 고등학생, 중학생, 부모님은 직장에 다니는 때라 다들 신도시로 나가야 하는데, 버스를 타려면 인도도 아닌 찻길을 20분가량 걸어가야 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집에서 나가면 차도 앞에서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고 '히치하이킹'을 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움직이거나 하면 간혹 택시를 부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히치하이킹'에 의존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던 집, 비가 오면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나와 차도를 향해 엄지를 들면 누군가는 꼭 태워주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태워주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태워줬으며, 난 태워주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겁도 없이 차를 탔을까? 2차선 도로에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으니 운전자로서는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태워주자는 속 깊은 아량이 작용했을까.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왔는데, 자주 지나가던 차들이 태워준다고 멈추곤 했다. 아마 인도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누군가가 매우 안돼 보였나 보다.


만약 다른 집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열에 아홉은 빚을 내서라도 차를 샀을 텐데(길에다 뿌린 택시비와 버스비, 정신적 스트레스지수를 더해보면 말이다), 우리 집은 차를 살 궁리는커녕 각자 도생해서 버티고 버텼다. 간혹 오늘 '히치하이킹'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감동적인 미담을 나누기까지 했으니 그걸 은혜라 여기며 혹시 어떠한 위험에 노출될지는 아예 염두에도 없는 채 지냈다.


'히치하이킹' 하면서 딱 두 번 식겁했던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운전자가 내려달라는 데서 안 내려주고 자꾸 다른 길로 가려해서 단호하게 내렸다. 또 한 번은 작은 트럭 옆자리였는데, 운전자가 자꾸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실실 웃으며 또 볼 수 있냐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해 황급히 내렸었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히치하이킹'을 안 하고는 다닐 수 없어서 거기 살았던 2년간 밥먹듯이 '히치하이킹'을 했다.


'히치하이킹'외에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교회 찬양단 연습 끝나면 집까지 데려다줬던 전도사님, 집사님. 당시 백수라서 시간이 많다며 내가 급하게 나갈 일이 있을 때 자주 태우러 와줬던 친구. 주일아침마다 반주하는 날 데리러 왔던 지휘자님.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가끔 택시를 탈 때가 있었는데, 탄 김에 집 앞까지 가면 길이 좋지 않다며 택시기사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으니,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날 데리러 와준 수많은 지인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이제야 되새기고 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어서'라는 말의 의미를 그때를 떠올리니 아주 조금 이해가 된다. 그 반지하 집은 답답해서 집안에서 뭘 할 수 없는 환경이었고(온갖 벌레는 예사고, 현관문을 열자 문 앞에 두더지가 헤매고 있기도 했고, 화장실에서 뱀도 나왔다), 각종 약속과 하고 싶은 일들로 가만있을 수 없는 20대 초반의 나는 논과 밭을 벗어나 매일 도시로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나오면 집에 갈 게 걱정이고, 그저 잠만 잘 뿐인 그곳의 개떡 같은 위치를 참아낸 지 2년 후 집주인이 집을 헐겠다며 나가라고 전세금을 빼줘서 다시 신도시로 탈출(?)하게 되었다.


지금 그곳은 집이 헐리고 건물이 들어와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선 아직도 선명하다. '히치하이킹'도 함께 말이다. 2000년대 초반이라 가능했을 것들. 20년 넘은 먼지를 털어내고 들여다본 그 시간은 그때만 존재할 수 있었던 신기하고 희한한 한편 감사했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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