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도서관으로 데리러 갈게

by 엄살

첫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던 날, 바로 하교하지 않고 학교 도서관을 찾아갔다.

선배맘들이 얘기하길 1학년 엄마의 별명은 '신데렐라'란다. 매일 4교시 마치는 시간에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려야 하니까. 당시 내 상황은 매일 2시에 같은 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둘째를 데리러 가야 하고, 아직 시설에 다니지 않는 셋째가 있어 첫째의 하교시간을 딱딱 맞추기가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교문에서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학교도서관에서 책 읽고 있으면 엄마가 찾아갈게'라고 아이랑 약속하며 입학식 날부터 도서관으로 향한 것이다. (당시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이라 학부모들의 학교 출입이 자유로웠다)


도서관엔 인상 좋은 사서선생님께서 앉아계셨다. 아이를 인사시키고 하교 후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려도 되는지 조심스레 여쭤보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다. 다음날부터 아이는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처음 일주일은 안절부절못하면서 혹시 엄마가 조금 늦으면 불안해했는데, 사서선생님께서 그런 아이를 토닥이고 재미있는 책들을 추천해 주셨다. 일주일이 지나자 책을 조금 더 읽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이를 엄마가 기다리는 쪽으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보통 첫째를 데리러 가면 나 혼자가 아니라 대부분 동생들이 같이 있었다. 사서선생님은 유모차에 앉아있는 막내, 호기심쟁이인 둘째를 위해서도 책을 추천해 주시고 초등학교 부설인 병설유치원에 다닌다는 이유로 둘째 이름으로도 대출해 주셨다. 덕분에 유모차에 매달아 놓은 도서관 전용 가방에 매일 새로운 그림책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아이들은 도서관의 DVD에도 관심이 많아서 애니메이션 DVD를 매일같이 빌려와 집에서 보여주는 수혜도 누렸다. 그때 보았던 <토토로>는 마르고 닳도록 대출을 반복하며 노래와 율동을 따라 하면서 여름장마를 같이 보낸 친구였다.


어느 날 사서선생님께서 학부모 그림책 동아리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단, 그림책 동아리에 들어오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일찍 와서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어야 한단다. 아이들 앞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도 떨리는데 셋째를 데리고 가능할까 싶었지만, 어쩐지 호기심과 용기가 발동했다.

엄마가 교실에 들어가 그림책을 읽어준다고 하니 아이들은 각자의 성향대로 반응했다. 첫째는 엄마를 걱정했고, 둘째는 병설유치원 가기 전에 교실에 함께 가서 그림책이야기를 듣고 가겠다고 했다. 셋째는 어차피 엄마옆에 있을 거니 상관없는 눈치였다.

그림책 읽어주는 매주 목요일 아침은 전쟁터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나도 평소보다 깔끔하게 옷을 챙겨 입고 셋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 둘째와 함께 학교까지 달렸다. 학교로 가는 길은 큰길을 건너진 않았지만 살짝 경사진 언덕길이라 도착할 때쯤엔 항상 헉헉대고 있었다. 첫째를 교실에 데려다주고, 둘째 손을 잡고 셋째는 아기띠로 업고 교실로 향했다. 유모차에 태워가면 셋째가 엄마를 찾으며 울 때가 많아서 아기띠로 업는 게 마음 편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교탁 옆에 돗자리가 깔려있었다. 학생들이 돗자리에 옹기종이 앉아 그림책 이야기를 듣는 거였다. 전날 우리 아이들에게 미리 읽어주며 연습을 했건만, 막상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얼마나 떨리던지... 책은 사서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시거나 내가 골랐는데, 반응이 좋은 날은 힘이 나고 별 반응이 없는 날은 힘이 빠지기도 하고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그림책 읽어주기를 진행했다. 학년 말 때쯤 6학년 반에서 <까마귀소년>을 읽어주면서 어설프게 까마귀 소리를 흉내 냈는데 끝나고 박수를 받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어설픈 낭독이 학생들의 마음과 연결되었다는 강렬한 느낌이 보람있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림책 읽어주기가 끝나면 격주로 그림책 읽어주는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도 사서선생님께서 주관하셨는데, 매 모임 때마다 그림책 작가와 책을 소개해주셨다. 매 시간 사서선생님께서 나눠주시는 종이에 적힌 처음 보는 작가와 책 제목이 생소했다. 그동안 그림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민망함으로 시작된 감정은 점차 진지함과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소개받은 작가별로 책을 대출해 작가만의 스타일을 알아보는 건 독서모임이 끝난 후 루틴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한 그림책을 골랐다가도 종종 위로받았다.


그림책 이야기를 깊게 나눴던 날 사서선생님께서 '데이비드 스몰'의 자서전 만화버전을 창고에서 꺼내와 빌려주셨다. 따뜻하고 유쾌한 그림책을 선보이는 작가의 어린 시절이 슬프고 외로웠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뒤이어 '데이비드 스몰'의 부인인 '사라스튜어트'의 <도서관>이란 그림책도 함께 추천받았다. 이 부부의 이름은 그 뒤로 그림책을 떠올릴 때마다 추억하는 찐친이 되었다.



스크린샷 2025-05-17 230515.png 그림책 <단추수프> 표지


그림책 동아리에서는 매년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기획했는데, 그 해에는 <단추수프>라는 책의 내용으로 연극을 준비했다. 회원들이 각본을 만들고 의상을 준비하고 음악과 녹음까지 최고의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공연 한달 전부터는 매일같이 모였다 . 난 셋째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동네주민으로 출연했다. 다들 배려해 주시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연극 공연도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림책과 함께 꿈같은 1년을 보내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근처에 새로 짓는 아파트에 분양신청이 되어서 1년만 다니고 전학시키게 된 상황이었다. 첫째는 전학 간 학교에서도 자연스레 하교 후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2년 후에는 둘째도 함께. 그러고 나서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한동안 학교도 도서관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첫째의 1학년 시기는 그렇게 내 삶에서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인지하게 된 중요하고 소중한 해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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