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살 Oct 05. 2024

어쩌다 007 작전 중

잡히면 죽는다, 혹은 잘린다

오전 10시,

단톡방에 문자를 보냈다.

"10시로 예정된 라이브 방송은 사정상 10분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약속은 칼같이 지켜야 하는데... 10분 후라니.. 이게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린지...'

자책할 시간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을 바라보며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오늘 라이브 방송은 자연스러운 소통이 컨셉이라 다행이라고 여기며...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좀 늦었죠? 너무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희 집 중딩이 중간고사 날이라 학교 보내고 아침부터 땀나게 청소하다가 늦었네요.

학생 자녀를 두신 분들 모두 고충이 많으시죠? 그런 의미에서 커피쿠폰 선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제품 소개와 학생 자녀를 둔 어머님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라이브 방송을 마쳤다.

아직 성과는 미비하지만, 재미가 있다.


  




오후 1시 반, 노트북을 켠다.

매일 오후 2시부터 학습지 교사로서 재택업무가 시작된다.

하필 2시는 막둥이가 하교하는 시간이다.

집에 들어온 아이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자연히 왼손 검지를 세워 입에 댄 "쉿"

혹은 "엄마, 지금 상담 들어가야 하니 조용히 해줘."이다.

내가 일하는 안방 문을 세게 열고 닫지도,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하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는 재택업무는 저녁 8시가 넘어서 끝난다. 나는 업무하며 짬짬이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으로 저녁을 해결한다. 2시부터 8시까지 앉아서 쉬지 않고 눈과 목과 귀와 손을 쓰다 보니 허리는 뻐근하고, 귀는 먹먹해서 한의원에 가서 한 달 치 월급의 반을 쓰고 왔다.


    




라이브 방송 관련된 본사 교육이 있는 날, 집에서 한 시간 반거리를 늦지 않고 가려면 아이들 등교 전에 후다닥 튀어나가야 한다. 두 시간 여의 교육을 듣고 나면 진이 빠지고 배가 고프지만, 재택근무 시작시간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하기에 서둘러 지하철에 오른다. 새로 론칭한 제품소개와 여러 가지 리추얼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한번 더 되새기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서두른 덕에 30분의 여유가 생겼다. 한숨 돌리며 구운 계란과 두유로 점심을 때우고 노트북을 연다.



    

출처 Pinterest


 

그렇다. 난 N잡러이다. 낮에는 학습지 교사이고, 여유되는 시간에 SNS계정을 관리하고 라이브 방송으로 뷰티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도 한다. 주 1회, 오전에 사무실에 출근한다. 밤에는 글을 쓴다. 이 모든 건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일도 하기 위해 선택한 삶이다. 말이 좋아서 프리랜서고 N잡러지, 학습지 교사업무로 평일 오후시간은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는 신세의 반 직장인이다. 



가장 힘든 건, 각각의 일의 성격이 달라 쉴 새 없이 모드를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뷰티에 관해서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학습지 교사로는 똑똑하고 정확하게, 글을 쓸 때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뿐인가, 엄마로서의 나는 한없이 인간답고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고 싶은데 일을 마치고 긴장이 풀려 가족들과 대면할 땐 에너지를 다 소진한 채 탈진 상태일 때가 많다.


   

출처 Pinterest



우연히 받았던 상담에서 일을 줄여보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하기엔 내가 가진 에너지의 크기가 작다는 게 이유였다. 이중에 무엇을 포기하면 좋을까? 일단 학습지 교사는 주 수입원이라 갖고 가야 하고, 글 쓰는 건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니 반드시 같이 가야 하고, 그렇다면 뷰티 일을 정리할까? 아직 1년밖에 안됐고, 제대로 시작도 못해봤는데 이 일을 놓는 게 맞는 걸까? 일단 시작 했으면 3년은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한지 얼마 되지않아 큰 기대없이 준비한 뷰티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이 일에 더 탄력이 붙었다. 역시 여기서 그만두기엔 아까워!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모든 일의 양을 조금씩 줄여보자였다. 일이 남아있더라도 잠잘 시간이 되면 몸을 쉬게 해 주었다. 매달 달력을 보며 무리하지 않게 스케줄을 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날그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주말에는 아무 스케줄도 잡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푹 쉬며 영양보충을 했다. 조금은 천천히, 완벽하지 않더라도 다 같이 가보자! 


    




일의 효율이 늘었다. 걱정할 시간에 일을 하니 잡념이 사라졌다. 참을성도 늘었다. 감사가 생겼다. 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일들이라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작으나마 성과가 나타나는 듯 했다. 그때그때 집중해야 할 일을 정해 일의 밸런싱을 달리해보는 쪽으로 일머리도 조금 진화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이 모든 일을 조금 더 뾰족하게 전문가적으로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이니 부디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모르게 해보자. '이건 뭐 이순신장군도 아니고, 007 작전수행 요원도 아니고...'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지니 내 안에 단단한 무언가가 생긴 듯하다. 내가 하는 일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안 서운하고, 누군가 옆에 있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부족한 내 능력을 탓할 시간에 일에 능숙한 전문가들에게 배우려는 자세가 생겼달까?  



출처 Pinterest

 


글이 N잡러로 사는 게 힘들다는 하소연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차피 N잡러로 살기로 한거, 007 작전을 수행하듯 조용히 들키지 않게~ 

이전 02화 별이에요, 돼지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