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간단해요
독감에 걸렸던 1호가 오늘부터 학교에 갔다. 워낙 조용하고 식사 때가 아니면 방에 틀어박혀 있는 아이라 나도 식사 챙겨주고 나머지 시간에는 평상시처럼 내 할 일을 하면서 보냈다. 그럼에도 4일 만에 세 아이가 다 등교하고 난 금요일 오전 집안 공기는 홀가분함이 묻어나는 따스함이 몽글거린다. 날이 흐려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은 누릴 수 없지만, 혼자 있는 거실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시간을 보니 오전 8:40.
'9시까지만 집안일을 하고 그 후부터는 내 시간을 갖는 거야.'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잠시 1호의 방에 들어갔다가(분명히 어제 청소했다고 했는데...) 온갖 휴지와 군것질거리 껍데기며 머리카락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빗자루를 챙겨 다시 들어갔다. 이 방에 의자는 왜 3개나 되는 걸까? 분명 앉으라고 있는 건데 책과 옷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있구먼. 옷은 옷걸이에 걸고, 책은 놔두고(나중에 잔소리용으로) 본격적으로 바닥을 쓸어보는데 한 짝밖에 안 보이던 필라테스 양말을 발견했다. 이 녀석, 분명히 자기 방에는 없다고 했으렷다. 약점하나 잡았다!!! 녀석의 방을 청소하다 보면 더러워서 화가 나기보다는 내 마음이 개운해질 때가 많다. 평상시 알뜰살뜰 챙겨주는 엄마가 아니다 보니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녀석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뿌듯함도 있고, 청소하면서 녀석의 낙서와 흔적을 볼 수 있는 것도 정겹다.
보이는 것만 대충 마무리하고 났는데도 벌써 10시가 되었다. 이제 남은 집안일은 오후로 미루자. 설거지도, 빨래 개키기도, 바닥 청소도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았다. 슬슬 허기가 밀려온다.
무를 잔뜩 넣은 어묵탕을 끓여야지. 아이들을 위한 어묵탕을 끓이면 나도 한두 개 먹긴 하지만 혹시나 부족할까 봐 다소 소극적으로 먹는다. 오늘은 나를 위해 한번 끓여보자. 어묵탕소스와 물, 대파, 청양고추, 다진 마늘을 넣고 잘라둔 무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냉동실에서 꺼낸 고*사 어묵을 털어 넣었다. 활기차게 끓어오르는 어묵을 보니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도 좋아진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냄비 채 식탁으로 가져와 어묵과 무를 국물과 함께 그릇에 담았다. 아이들에게 양보했던 통통하고 길쭉한 어묵은 중간에 고추가 들어가서 감칠맛이 났다. 그래서 녀석들이 맵다고 했구나. 진즉 내가 먹을걸. 먹으면서도 눈은 어느새 11시를 향해가는 시계를 보고야 만다. 아, 내 아침시간....
서둘러 노트북을 켰다. 오늘 아침에는 12월 내내 나를 짓누르는 무겁고 답답한 무언가에 대해 글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12시 반부터는 할 일이 있으니 알람을 맞추자.
“시리야."
"네"
"12시 반에 알람 울려줘."
"12시 반에 알람이 설정되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오전 내내 허둥지둥하다가 시작도 못하면 그게 또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시작은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주중에 짬 내어 정신없던 거실을 치우고 소소하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는데, 부지런 떨길 잘한 것 같다. 정돈된 거실을 보니 심란한 마음이 좀 나아진다. 순간이지만 거실로 빛이 스민다. 이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노트북을 열 때만 해도 우울하고 심란한 글이 써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은 오히려 살짝 흥분돼 있다.
상큼한 게 당겨서 냉장고를 연다. 찬장을 열고 크리스마스 접시를 찾는다. 이맘때마다 꺼내기 시작한 게 10년이 넘어가는데 매년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게 신기하다. 1호가 독감에 걸렸다고 지인이 선물해 준 유기농 귤은 껍질이 얇고 과육은 엄청 달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귤을 순식간에 2-3개 까서 먹고 또 자판을 두드린다.
앗, 12:30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오후를 보낼 힘이 생겼다. 나에게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깨끗한 환경에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에너지가 생긴다. 매일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또 기억해 냈으니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