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원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지
늦은 금요일 밤이다.
이 시간이면 일주일의 회사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지만, 이번 주말은 풀 근무라 못 온다고 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우리 자기!”
(목소리가 살짝 크면서 하이톤인걸 보니, 밖이구만.)
“ㅎㅎ 어디야?”
“나 지금 00랑, 00랑 한잔하고 있어. 우리 셋 다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 오늘 일 마치고 모였지. “
“그래, 고생이 많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잘 들어가.”
”근데, 자기야. 나 저번에 200만 원 보내줬는데 자기가 ‘응‘ 그러고 넘어가서 진짜 서운했어. “
“그랬어? 미안미안~당연히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그거 내가 아끼고 안 먹고 안 쓰고 모아서 보내준 거야. 칭찬 안 해주면 힘이 안 나."
“아이고 미안, 앞으론 신경 쓸게.”
말은 그리 했지만, 당시에는 이놈의 섬세한 성격을 어찌할꼬 싶었다. 어째 돈 보내주고 일주일간 통화할 때마다 목소리톤이 다운 돼 있다 했다.
남편이 보내 준 200만 원은 생활비가 아니다. 나한테 주는 선물? 그런 것도 아니다.
지금 월세로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분양받을 시기가 왔고 몇 개월 안에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전에 받은 대출을 갚아야 해서 얼마 전부터 월급 외 여윳돈이 생기면 따로 모으고 있다. 나 역시 학습지 교사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하고 있기에 그가 준 금액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 돈을 그냥 당연하게 받았나 보다. 따지고 보면 200만 원은 내 한 달 월급정도의 큰 금액임에도 말이다.
그럼 그는 월급 외 200만 원을 한두 달 내에 어떻게 모았을까. 대부분은 주말 내내 출근해 받은, 남들 쉬는 시간에 그의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은 금액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생활비를 아끼고 아꼈다고 했다. 그것만 해도 엄청 잘했다고 아내한테 칭찬을 실컷 받아도 모자랄 판에 “응, 알았어.”라는 짧은 답변이라니,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하필 그날따라 대화의 화제가 200만 원을 보냈다는 얘기 바로 뒤에 이번 설 연휴에 시댁 가족들이 어떻게 모일 것인지에 대한 얘기가 따라붙어서 자연스레 "너무 고마워. 고생했어."가 쓱 지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지. 나도 열심히 일해서 보태고 있는데 그렇게 삐질(?) 일인가 싶기도 했다. 괜스레 내가 일하기 전에 본인 혼자 돈 번다고 "내 돈, 내 돈" 하면서 서럽게 만들었던 생각도 나고, 그때 오죽하면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나중에 돈 벌면 너 상종도 안 한다.' 하면서 이를 갈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남편은 외벌이로 10년 넘게 아내와 아이들 셋을 건사하면서 많이 힘들어했다. 혹시나 본인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식구들을 어찌 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할 때 나 역시 경단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시원스레 답변을 못하고 그런 화제가 나온 날은 어김없이 부부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생각지 않게 나도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혼자 버는 게 아니라 같이 번다는 든든함이 그를 힘나게 했다. 주말에 집에 오면 대접받으려 하는 게 아니라 팔 걷어붙이고 화장실 청소부터 음식 만들기, 장보기도 같이 하니까 말이다.
따지고 들면 누가 더 치사하고, 이기적이냐 아니냐를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내 가정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싶다면 과거의 속상함 서운함은 쿨하게 잊어줄 수 있는 거니까'라는 게 내 지론이다.
"자기, 나 이번에 적금만기되면 우리 대출 앞자리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 들었던 1년짜리 적금만기가 다가왔다.
"우와, 잘됐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남편은 매우 좋아했다.
"우리 다 고생하는데 뭐. 너무 칭찬 안 해줘도 괜찮아. 그런데, 다음 달부터는 월급이 좀 줄어들 것 같은데..."
"왜?"
"나 이번에 학생들 많이 올려 보냈잖아. 우리 일이 학생수에 따라 월급이 달라져서 학생수 채워질 때까지는 그전처럼 받기 힘들대."
"그렇구나.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메꿔볼게."
"뭘?? 뭘 어떻게 메꿔?"
"이제 날도 따뜻해졌으니까 대리도 한 번씩 해보려고."
"대리? 일 많아서 주말출근까지 하면서 대리까지 하는 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사실은 이미 몇 번 했어."
"뭐?"
"생각해 봐. 내가 200만 원을 어떻게 만들어서 줬겠어? 아무리 주말출근을 많이 해도."
"참나, 대체 언제 대리를 한 거야?"
"가끔 나 밤 12시 넘어서 전화할 때 있었잖아. 그럴 때. 자기가 나 대리한다고 걱정하니까 말 안 한 거지."
"아이고 못 말려. 그런데 칭찬을 안 해줬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ㅎㅎㅎ."
남편의 꿈은 대출을 다 갚고 홀가분하게 은퇴(!)하는 거다. 나의 꿈은 평생 하고 싶은 일 하는 거고. 그래서 현재 난 설렁설렁, 남편은 투쟁적인가? 여하튼, 열심히 했는데 앞으로 궁둥이 팡팡해 가며 칭찬 듬뿍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