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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공간욕

어마무시합니다

by 엄살

"너희 집은 꼭 방 4개짜리로 이사 가야 해."

"왜요?"

"남편이 자기 방을 가지려고 하잖아."

"그렇긴 하죠. 아이들도 클 테고...."




남편의 방....이라...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결혼하고 방이 두 개인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자기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에 우리 집은 세 식구였다.

기어 다니는 큰 딸과 남편과 나.

두 방 중 하나에는 옷장이 있고 그 옆에서 셋이 잠자는 공간.

거실 겸 주방은 소파와 피아노, 이인용 식탁과 아일랜드 식탁이 존재감을 뽐내고.

작은 방 하나는 국민책장과 나머지 짐이 들어가 있는 애매한 곳.


아이가 어리다 보니 공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활용하는 방법도 몰랐던 참 어렵고 답답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 공간을 달라'는 남편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남편은 작은 방에 책상을 놓았고, 아이가 어지르면 어지르는 대로 쓸고 닦고 하면서

그곳에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나랑 큰 아이도 한 번씩 영화관람을 했다.


둘째가 태어났다.

호기심 많은 둘째는 아빠방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사실 두 아이 다 좋아했다.

남편의 방에는 작은 의자가 생겼고, 거기에 앉아서 아빠가 노는 것(?)을 구경하거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볼 때가 많아졌다.


셋째가 태어났다.

집이 비좁아졌다.

가족들끼리 어깨가 부딪히고 이리저리 치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 방 세 개짜리 지금의 집을 분양받아서 입주할 날을 기다리면서 참을 수 있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의 성향은 아빠랑 거의 흡사했다. 본인의 방을 필요로 했다.

아빠가 자신의 방을 첫째에게 주었다.('빼앗겼다'가 맞는 표현일까?)

자신의 공간을 잃고 거실에서 방황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파트 카페에 '독서실 책상'을 드림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남편은 그것을 드림받아 거실 구석에 갖다 놓았다.

퇴근하고 오면 어질러진 거실바닥을 이리저리 피해 독서실 책상 안으로 쏙 들어갔다.


거실 구석에 독서실 책상이라니....

가뜩이나 정신없는 거실에 독서실 책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탁 트인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거실을 계속 오픈형으로 놔두고 싶어 하고,

남편은 책장을 옆으로 눕혀서라도 구역을 나눠서 사용하고 싶어 했다.

장소 활용만큼은 둘이 상극이었다.





드디어 이사를 했다.

방 3개인 집.

안방은 나랑 남편과 막둥이가 킹사이즈 침대를 함께 사용하고, 작은방 하나는 침대 두 개를 붙여서 첫째와 둘째가, 마지막 하나는 남편의 방이었다. 그때까지는 아주 평화로웠다.


이사 온 지 3년이 흘러 첫째가 5학년이 되던 해에 자신의 방을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 남편이 지방근무로 평일에는 그쪽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집에 오게 되면서 자기 방을 첫째에게 주게 되었다.(역시 남편은 '빼앗겼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지방근무는 6개월 뒤에 끝났고, 돌아온 남편은 갈 곳(?)이 없어서 거실 소파와 안방의 화장대 옆 공간에 주로 머물렀다. 그 기간이 일 년 정도 되었는데 매우 우울해했다. 그러다가 안방 침대를 최대한 문 바로 옆으로 붙이고 생긴 여분의 공간에 책상을 들여놓고 침대와 책상 사이에 파티션을 설치했다. 책상 위에는 넷플릭스 시청용 모니터를 들여놓았다. 남편은 그제야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회사가 이전하게 되면서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어서 나가게 되었다. 그동안 살면서 남편의 성향을 파악한지라 원룸을 얻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찬성했다. 남편은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서 분명히 행복할 거라 예상했는데, 역시 틀리지 않았다.


주말에 집에 오면 자신의 공간에서 충전한 에너지를 가족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충만해져서 돌아오니까 말이다.


최근 <<자기만의 책방>>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책방은 저자의 공간이고, 사는 집 2층은 남편의 공간이라는 이야기가 공감되었다. 3년 전에 선물 받았음에도 지금껏 읽지 않다가 이제야 읽게 된 것은 아마 내가 내용을 이해할만한 깜냥이 안 되어서였을듯.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만큼 남편의 공간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남편은 언젠가는 원룸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집에서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남편뿐 아니라 아이들도 자라서 자신들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일단은 현재에 충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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