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게임하면 무조건 중독이야?

게임했다가 부부싸움 날 뻔

by 엄살

"너도 참여해. 북만 치면 되는 거야~"

"안 자면 40분 내로 북좀 두드리삼."


절친에게서 문자가 왔다.

'뭘 두드리라고?'


뭔가 하고 봤더니 얼마 전 동생이 가입하라고 했던 스마트폰 앱에서 하는 게임이었다.

팀을 짜서 매시간 북을 두드리는 거였다.

'ㅎㅎㅎㅎ 간도 크다. 나한테 이런 걸 부탁하다니...'

싶으면서도, 스스럼없이 한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마침 막둥이가 독감에 걸려 열이 안 떨어져 물수건으로 닦이고 잠깐 쪽잠 잤다가 일어나 멍하니 있는

상황에서 한 번씩 "북 쳐라."라는 메시지가 반갑기도 했다.


북을 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시간에 5000번을 치려면 15-20분 동안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왼손으로 했다가, 오른손으로 바꿨다가, 양손으로 했다가, 한 손가락으로, 그다음엔 두 손가락으로 하다 보니 손에 힘을 빼고 두 손가락으로 하는 게 가장 쉽다는 걸 알았다.(고수들을 더한 요령이 있을 테지만...)

혼자 하다가 힘들면 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둘째는 당연히 해줄 것이고, 첫째는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두 아이 모두 재밌어했다. 나중엔 증세가 조금 호전된 막둥이도 동참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습관처럼 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자기, 게임도 해? 생전 이런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응, 이번에 좀 해보려고. 생각보다 재미있네."

"그래? 그럼 나도 한번 해볼까?"


'좋았어. 이 사람도 응원군으로 영입하면 되겠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춘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야, 내가 왜 핸드폰 게임을 다 지운 줄 알아? 이거 가만히 보니까 매시간마다 들어와서 북 치는 거네. 그럼 하루종일 매여 있게 되고, 계속 북 치는 거에 신경이 집중될걸. 그렇게 며칠 하다 보면 엄청 피폐해져. 그리고 졌을 때는 내가 한 노력이 아까워서 열받고, 그러니까 계속하게 되고."


'역시, 순순히 북을 쳐준다 했더니 그럴 리가 없지. 하여튼,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다니까.'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당장 지워. 이거 계속하면 중독돼. 자기 아침부터 이거하고 있는 거 봐봐."

"뭐? 중독? 자기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이거 얼마나 했다고 중독이라그래?"

엄마아빠가 서로 얼굴을 붉히는 동안 막둥이가 우리를 흘낏거리며 내 대신 북을 치고 있었다.


언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후로 내 표정은 심하게 굳어있었고 북을 치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이건 눈치를 볼 일이 아니라는 걸. 갈등을 싫어하는 내 성향 때문에 남편이 반대하니까 일단 거기서 멈추긴 했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잠깐 산책을 다녀오겠다 하자 남편이 따라나섰다. 아마 변해버린 내 표정과 분위기를 귀신같이 파악하고 꼬리를 바짝 내리려는 심사겠지.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길로 들어섰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보고 게임을 지워라 마라 한건 좀 지나친 것 같아. 북을 치든 뭘 하든 친구가 부탁한 거 들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그걸 가지고 중독이니 뭐니. 내가 자기랑 애들 게임하는 거 가지고 뭐라고 안 하는데 나한테 왜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랬더니 갑자기 팔짱을 끼면서

"자기야, 난 자기가 진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아서 그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먼!!!'


남편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갖은 애교를 부렸다. 나도 굳이 싸울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못 박고 넘어갔다.


이로서 북 치기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난 오늘도 열심히 북을 쳤다. 점점 팔이 아파와서 끝날 시간이 기다려졌다.


이 일로 몇 가지를 깨달았는데, 타인과의 갈등이 싫다고 피하지 말 것. 남편에게 유하게 대하지만 선을 넘었을 때는 단호하게 이야기할 것. 올해는 북 치기처럼 안 해본 것도 한 번씩 해볼 것.


북 치기가 끝날 때쯤 친구와 대화를 했다. 친구는 내가 예상외로 너무 열심히 해줘서 놀랐다고 했다.

"나 지는 거 싫어하잖아.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지. 그리고 왠지 네가 부탁하니까 들어주고 싶더라."


난 그저 북 치기가 끝나서 홀가분하고, 당분간은 게임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 그동안 투자한 시간만큼 쉬고 싶을 뿐...'남편, 이래도 내가 중독이야?'





keyword
이전 10화못된 남편이랑 사느라 고생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