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그러지 말든가!
직진을 좋아하고 감정적인 나 vs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며 쉽게 흥분하지 않는 남편.
토론을 시작하면 90% 이상은 나의 참패이다. 참패한 것도 열받고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남편이 얄미워서 씩씩대고 있으면, 남편은 눈치 보는 척하며 기분이 풀릴 때까지 잘해준다. 그래도 기분이 안 풀려서 새눈을 치켜뜨면 대뜸 "못된 남편이랑 사느라 고생이 많아." 하며 꼬리를 내리는 척한다. 병 주고 약 주고, 이걸 죽여 살려하면서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확 뿜어 다 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약이 오른다.
흔한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시작은 별거 아니다. 어떤 배우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그 배우의 사생활 얘기가 나왔다. 배우는 공인이니 사생활을 잘 관리하는 것은 프로로서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는 게 내 의견이었다. 남편은 배우는 예술가이니 자유를 주어야 다양한 연기와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며 사생활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는 입장이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해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다며, 배우가 실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
남편의 얘기가 틀린 얘기는 아니다. 나도 모르게 연예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것도 맞고, 언론이 보여주는 모습을 다 사실이라고 믿고 비난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열받는 이유는 이야기가 길어지면 질수록 끝까지 흥분하지 않고 나를 살살 약 올리면서 자기주장을 펼칠 것이기 때문에, 토론을 시작하기도 전에 “네 말도 맞다."라고 인정해 버리고 끝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격렬한 논쟁을 한 것도 아닌데, 가볍게 한마디 한 것이 예상치 않은 반응으로 되돌아오면서 토론이 되면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평소 뉴스는 머리기사만 보고 깊이 파지 않기에 시간을 길게 끌면 나만 불리해진다.
남편이랑 대화하면서 뭘 그렇게까지 긴장해야 하는지 어이없기도 하다. 하긴,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좀 독특했다고 기억한다. 내가 A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시작한 대화에서 남편은 BCDE 등의 알파벳을 뛰어넘은 알파 베타류의 대답을 해서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더라도 난 그냥 기분을 환기하면서 가볍게 봤을뿐인데 어떤 부분이 가장 감명 깊었는지 어떤 부분은 어떻게 느꼈는지를 꼬치꼬치 물으면 굳이 할 말이 없었다. 다행인 건 그것 때문에 싸우거나 하지는 않았고 좀 불편하다고 느낀 정도.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엔 주로 남편 혼자 극장에 가거나 드라마나 예능을 보거나 할 때가 많아지면서 내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 남편은 무언가를 볼 때 혼자 집중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고, 같이 본 사람이 있으면 작품에 대한 얘기를 깊이 나누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차라리 그 시간에 머릿속을 비우고 잠을 자거나 멍을 때리는 휴식이 필요한 시기여서 남편이 혼자 나가는 게 더 편했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책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자신이 읽은 책을 권하고 나도 한두 번 읽어보았지만, 내 독서 취향이 생기면서 우린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었다. 만약 같은 책을 읽고 남편과 토론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나한텐 너무 곤혹스러운 일이다.
"나는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 같아."
산책길에 내가 이야기했다.
"나는 숲은커녕 나무 하나를 보아도 납작 엎드려서 현미경으로 구석구석 들여다봐야 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응수했다.
그리고는
"책을 읽다가 좋은 표현이 나오면 거기에 꽂혀서 몇 시간이고 생각하고 있잖아."
줄거리 자체가 궁금해서 속독을 해버리는 나랑은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속독 후에는 꼭꼭 씹어서 정독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책을 반복해서 읽으려고 한다.
어떤 방식이든, 방법이든 옳고 그른 건 없고 다름만 있다는 사실을 남편으로 인해 깨닫게 된다. 그 과정이 지난했고 이제야 서로 어우러져 편해지고 있다. 서로 달라서 가끔씩 불쑥 올라오는 짜증이 있지만 그것보다 좁은 시야를 벗어나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됨을 이제는 감사하게 되었다.
(자기 얘기에 동의해주지 않고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이는) "못된 남편이랑 사느라 고생이 많아."
오늘도 남편은 잠시의 토론 끝에 열이 오른 내 눈치를 보며 저 멘트를 꺼냈다.
"아니야. 나도 내 생각에서 벗어나서 다른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어서 좋지 뭐." 이를 악물고 응수했다.
아, 이기고 싶다. 격렬하게 이기고 싶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상하게 이기고 싶다.....
사소한 거에 목숨 걸지 말라는데 자꾸 목숨을 걸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