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by 엄살

학습지 교사로 오후 2시의 업무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오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약속은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고, 30분-1시간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일어난다.


올 겨울은 많은 아이들을 초등으로 이관 보냈고, 아직 학생수가 채워지지 않아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론 그만큼 월급은 줄어들었지만...)

그 분위기를 타고(분위기는 내가 자진해서 탄 거다^^;) 작년 말 gtx까지 개통을 한 덕에 아주 바람이 단단히 들어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서울 각지의 지인들에게 살살 연락을 취했다.

장소는 집에서 딱 한 시간 걸리는 '서울역'!


월요일 오전, gtx를 타고 10시에 맞춰 서울역에 도착했다.

'연남 방앗간'이 약속장소였다. 서울역에 위치해 있고, 이름이 너무 맘에 들어서 전부터 눈독 들였었는데 마침 오전 9시부터 문을 연다고 한다.

메뉴는 참깨라떼, 참깨 아이스크림 등등...

참깨라는 닉네임으로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출판사 편집장(친구)도 만나는 거라 더 재밌겠다 싶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추위를 뚫고 도착했는데, '갑작스러운 공사로 12시까지 입장불가'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은 생각 안 하고 왔는데, 곧 친구들이 올 텐데 어디에서 보자고 하지? 손을 호호 불면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한 친구가 도착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서울역 쪽 주변 커피숍을 훑으며 들어갈 곳을 물색했다. 태극당은 단팥빵이 유명한 곳인데 차를 마시기에는 테이블이 좁고, 그 옆 가게는 포장만 가능하고, 근처에 스타벅스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더니 20명 넘는 사람이 줄 서 있어 놀래서 나왔다.

서울역은 ktx와 각 호선이 만나는 중심지라 여행을 가는 사람, 오는 사람, 그 외에도 유동인구가 엄청 많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근처 1층 커피숍은 무리일 것 같았다. 친구가 검색을 해서 근처에 커넥트 플레이스 4층 '센터커피'라는 곳을 찾아냈다. '4층이니 괜찮겠지?' 우린 다른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커넥트 플레이스는 서울역 바로 옆에 롯데아울렛과 홈플러스가 있는 두 건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센터커피'는 롯데아울렛 건물이었고, 우리는 그 옆의 홈플러스 건물로 올라갔다. 심지어 홈플러스 건물은 10시 반에 오픈이라 올라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막혀있는 문을 겨우 들어가 4층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센터커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다른 친구가 도착했고, 그 친구는 서울역 지리를 조금 아는 편이라 우리보다 먼저 '센터커피'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 1층으로 내려와 매장 직원분께 옆 건물로 가는 방향을 물어물어 겨우 4층으로 올라갔다. (와, 이 정도면 외국인 관광객 수준인데?! 여기 우리나라 맞아? 우리 왜 이렇게 헤매는 거지?)


센터커피에 도착할 즈음 걸음수는 5 천보를 넘었다. 그새 나머지 한 친구도 도착했고, 우린 차라리 11시에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합의를 했다. 이 복잡한 곳에서 12시만 넘어도 사람이 몰릴 테니 식당에 조금 일찍 가서 자리라도 맡자는 거였다. 올라올 때 보았던 '토끼정'에 들어가 메뉴를 고르고 나서야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고 얘기도 하다만 채 난 근무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연남방앗간'만 제시간에 열었어도...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덕에 서울역 지리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






"엄마, 저 이번 주말까지 '종의 기원'이라는 책 좀 빌려다 주세요."

큰아이가 부탁했다. 검색해 보니 워낙 인기 있는 책이라 근처 도서관에는 없고, 버스로 30분 걸리는 도서관에 있었다. 거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시간이 조금 널럴한 금요일에 도서관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다른 동네에 도착해 10분가량 언덕을 올라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 세워져 있는 '오늘 휴관'이란 네 글자... 책을 발견했다고 너무 기뻐한 나머지 휴관일을 체크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들을 대부분 금요일에 휴관이었다)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그다음 코스로 가야 하는 '아주아루베르'라는 디저트가게를 검색했다. 케이크가 필요했는데 마침 도서관 근처여서 들러서 구입하려고 예약까지 해놓은 참이었다. 그곳은 언덕을 내려와 직진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KakaoTalk_20250215_220245165_01.jpg '아주아루베르' 디저트 가게


예약한 딸기 케이크를 소중히 받아 들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책까지 대출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는 노밀가루 100% 쌀케이크를 구입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자.'


집에 도착해서 도서관 휴관소식을 이야기하니 큰아이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엄마 헛걸음하게 했다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둘째는 "도서관 너무해." 하면서 내 편을 들어주는데 마음이 저절로 녹았다.






생각해 보면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될 때보다 뜻밖의 상황이 생길 때가 훨씬 많았다. 도서관 문 앞에서 '휴관'이란 글자를 보았을 때 '12시까지 공사 중'이었던 연남방앗간이 떠올라 '이번 주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찰나 급하게 그 생각을 지웠다. 그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늘은 도서관 휴관 날짜를 체크하지 못한 내 불찰일 뿐이었다. '이래저래 바깥공기 쐬고 걷기 운동 많이 했다'라고 충분히 위안하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한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던 후회스러운 기억이 생각보다 많이 저장되어 있다.

'그때 굳이 그걸 고르지 말걸.'

'그때 굳이 거기에 가지 말걸.'

'그때 굳이 화내지 말걸.'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기억들임에도 한 번씩 떠오르면 자책을 하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때 그걸 골랐으니까 그게 별로였다는 걸 알았고, 가봤으니까 어떤지 파악했고, 화내봤으니까 다른 태도도 취할 수 있을 테다. 후회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로 툭툭 털어내 보련다. 내가 나를 용납해야 남의 실수도 용납할 수 있지.

이번 주에 이리저리 헤매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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