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묵밥 좋아하거든

난이도 중

by 엄살

1월에 시작한 아이들 겨울 방학이 명절을 기점으로 반 이상 지났다. 중학생 두 명, 초등학생 고학년 한 명인 아이들은 아무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세끼를 먹는다.

밥 하는데 실력도 요령도 없는 느림보 엄마가 세 아이들의 삼시 세끼를 챙기기란 과장 조금 보태서 살 떨리는 일이다. 세 명의 식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얼큰한 국물요리, 특히 김치가 들어간 것을 선호하는 만큼 단맛이 나는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 첫째.

돌쟁이 때부터 설렁탕 같은 하얀 국물, 어묵 국물 등 맑은 국물을 꿀떡꿀떡 마시고 야채 찜 같은 따뜻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토마토는 절대 안 먹고 체다치즈도 입에 안 대는 둘째.

음식의 맛보다 케이터링이 중요하고, 빵과 떡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며 최근엔 다이어트에 관심이 생겨 닭가슴살 같은 단백질 요리를 주문하는 셋째.


매 방학 때마다 "아침은 간단히. 점심과 저녁 하루에 두 끼만 챙기자."라는 선언을 하고 시작한다.

거기에 하나 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니 한 명이라도 만족하면 성공한 거다."라는 말로 정신승리를 해야만 버틸 수 있다.






주말에 잠시 숨 돌리러 혼자 카페에 갔다가 먹은 계란 샌드위치가 너무나 실하고 맛있어서 굳이 3개를 포장해 왔다. 빙판길을 걸어오면서도 넘어질 걱정보다 방금 만든 따끈한 샌드위치가 식을까 봐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불렀다.

"이리 와봐. 엄마가 샌드위치 사 왔어!"

오랜만에 사 온 간식이라 함박웃음을 기대했는데 뭐지? 빵순이인 막둥이만 빼고 표정들이 시큰둥하다.

둘째가 묻는다.

"이거 체다치즈예요?"

"앗, 너무 맛있어서 체다 치즈인걸 깜박했네."

첫째도 이야기한다.

"혹시 이거 달아요?"

"아, 맞다. 캐러멜 시럽 들어가서 살짝 단 맛도 나."


"엄마, 전 맛있어요."

막둥이를 제외한 언니들 두 명은 뒤돌아 가 버렸다.

내 입에 맛있다고 순간 아이들의 식성을 잊고 신나게 주문을 해 온 스스로가 뻘쭘하다.

역시, 셋을 다 만족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장을 보다가 따끈한 묵밥이 생각나 묵을 사 왔다. 보통 아이들 메뉴는 매끼 한 가지로 통일하는데 묵밥은 둘째만 좋아해서 사 오면서도 '과연 언제 먹을 수 있을까' 기약이 없었다.

시간이 여유로워야 두 가지 메뉴를 하는데, 그 여유란 게 쉽사리 나지 않았다.

"엄마, 묵밥 먹고 싶어요."

'묵밥을 내가 저번에 왜 해줬을까? 그냥 참을걸...'

먹고 싶다는데 다른 두 아이를 위해 메뉴 하나를 추가할 생각에 슬슬 짜증부터 밀려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어 시계를 보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묵밥은 묵을 데치고, 국물을 만들고, 계란 지단이 필요하고, 김치양념을 해야 하니 필요한 재료부터 꺼내자. 나머지 둘에게는 스팸을 넣은 김치찌개로 합의(?)를 보았다.


냄비는 두 개뿐이라 하나에는 찌개를 끓이고, 하나는 묵밥 국물을 만들었다. 그동안 전기주전자에 묵 데칠 물을 끓였다. 계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프라이팬에 올렸다. 김치를 꺼내 잘게 잘라 양념을 했다. 이 모든 걸 하면서도 신경은 시계에 가 있었다. 재택근무 시간이라 노트북 화면과 전화기를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묵밥 재료가 완성되었다.



KakaoTalk_20250208_203641014_01.jpg 한 자리에 모인 묵밥의 주인공들


"우와, 묵밥이다."

아.... 다 이루었다.

굳이 이걸 꼭 지금 해달래야 했니?

같이 먹으면서도 이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나도 묵밥 좋아해.

남이 해준 묵밥 말이지.

내 손이 느린 걸 탓해야겠지?

손 느린 엄마는 해달라는 걸 해주는 즐거움보다 시간 걸리는 걸 해달라는 게 매우 야속하게 느껴지는구나.







아, 그런데 이 시간에 사진을 보니 먹고 싶다아~

내일 또 기억이 사라져 묵을 사 오는 거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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