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림
간만에 재밌는 드라마를 보다가 대사 하나에서 확 기분이 상해버렸다.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이야기다.
드라마 속에서 저 대사의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금명이가 남자친구인 충섭에게 했던 대사다.
우리 아빠가 no면 나도 no야!
라며 금명이는 살짝 협박이라도 하듯 눈을 뜨고 남자친구 충섭이를 흘겨봤다.
이후 충섭이는 행여 결혼이 깨질까봐 절절대며 관식에게 잘 보이려고 못 마시는 술도 마시고 새우도 까준다고 하며 갖은 아양을 다 떤다. 상견례 자리에서 국을 못 푸면서 잘 푸려고 노력했던 금명이처럼. 영범이의 집에서 영범이 엄마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싸늘한 분위기에서도 애써 오랜만에 집밥 먹으니 맛있어요, 라며 웃던 금명이처럼 말이다. 또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출산한 금명을 찾아온 관식과 애순 앞에서도 충섭은 몸둘 바를 모르고 말을 버벅거렸다.
다 마음에 드는 드라마였는데 저런 장면들이 좀 거슬렸다. 나도 여자고 며느리고 엄마이고 딸이지만,
우리 아빠가 no 하면 나도 너 no야! 라니?
입장을 바꿔볼까?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우리 엄마가 no 하면 나도 no 야!” 라고 한다면 어떨지,
협박하듯이 노려보는 게 아니더라도
장난치듯이 저렇게 말하며 눈을 살짝 흘긴다면
그 남자랑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게다가 예비 시어머니가 며느리 손을 잡고
“내 천국을 오늘 너에게 준다.“ 라든가
“내 아들 고생시키지 말게.“ 라든가
“차렷!!!!! 차렷!!” 을 외친다면? 소름이 돋는다.
상대에 대한 존중에 있어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자든 여자든 서로 존중해야 맞다.
여자가 핍박받은 세월이 길었다고 하여 그 세월만큼 남자가 여자에게 납작 엎드리는 게 통쾌하게 웃으며 볼 만한 장면인지 잘 모르겠다. 영범 엄마의 무례한 태도에 영범이는 “어머니!!” 한 마디밖에 안 했다며 욕을 그렇게들 하던 시청자들이, 충섭을 향한 관식이의 저런 발언과 행동들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던 금명이에게는 관대한 것 같았다.
딸 크는 30년 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너에게 내 천국을 준다, 라니. 예비 시어머니가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셨어서 금명이를 예뻐한다는 말에, “니집 딸 아니고 내딸!” 이라고 정색하고 정정하는 발언이라니. 그야말로 영범 엄마가 똑같은 말을 금명이에게 했으면 거품 물고 비난했을법한 말들이 아닌가? 애순이가 영범이를 두고 아들 같다고 했으면 영범이 엄마가 딱 저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집 아들 아니고 내 아들입니다만?!”
재밌게 보던 드라마가, 충섭이 금명이네 가족을 만나면서부터 김이 팍 식어버린 이유다.
아무리 드라마 주 시청집단이 아줌마들이라지만...
혹시 여자들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제시하는 게 드라마의 첫 번째 집필의도였을까?
여자에게 혹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자잘하게 구박 받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한 여자만 사랑하는 그런 우직한 남자의 모습 말이다. 글쎄, 기울어진 사랑은 나는 불편하더라. 남자는 다 퍼주고 다 져주고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고, 여자는 새침하게 오케이, 구박하며 오케이, 열번 모른 척하다가 한번 은근스럽게 표현해주면 아주 감지덕지라니. 그런 사랑, 조금 올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올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긴 하다만.
그냥 관식이도 충섭이를 존중하고, 충섭이 엄마가 금명이를 그렇게도 예뻐했듯 충섭이를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너무 교과서 같은 이야기로 보여졌을까?
아기가 태어난 후 산부인과 병실에서 소외된 충섭이의 모습이 참 마음 아팠다. 충섭이 엄마가 그의 애쓰는 모습을 보면 속상할 것 같아서 괜히 울컥했다.
애순이가 관식에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무라는 장면이라도 하나 넣어주지.
뭐 물론 시어머니의 구박이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으로 상쇄되는 건 아닐테지만.
나 참, 별게 다 불편하다.
이래서 드라마 작가가 못 되었나보다.
내가 드라마를 쓸 때는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완벽한 스토리를 만들려다 보니대사도 장면들도 모두 어색하게 연결되고 말았다.
그런 드라마를 누가 보겠어,
상처도 받고 위기에도 처하는 게 인생인데.
그래야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건데.
그래도 끝에 애순이의 시를 보며 장하다고 하던 클로이를 볼 수 있어서 그건 좋았다.
염혜란의 재등장이 너무 작의적이었다며 비판하는 누군가도 있더라만 나는 그 부분은 싫지 않았다.
부모에게 후회 가득한 세상 모든 자식들의 마음을 조금은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달까?
부디 관식이도 박태환이나 펠프스로 환생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