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림
일상은 조용히 흘러간다.
작년 이맘때 관계와 일로 폭풍 같았던 시기에 비하면 평화로운 하루하루다.
새로 옮긴 직장은 이전과 달리 정상적이고,
보통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 몫을 하며 서로를 배려한다.
가족들과도 요즈음은 괜찮다.
자잘한 충돌이야 늘 있고 생활비는 항상 모자라고 아직 우리 명의의 집도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10년 넘어 골골대는 차를 끌고 근교로만 나가도 서로의 일상을 재잘재잘 털어놓는 그 시간이 행복하다.
행복, 그래.
더 욕심내지 않고 행복하다. 행복한데......
자꾸 꿈을 꾼다. 깼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은 꿈.
그렇다고 뭐 기분이 나쁜 꿈도 아니다.
이제는 연락이 끊긴 학창 시절 친구들이 나의 현재 직장 동료가 되어 등장하거나 작년 이맘때 일방적으로 나를 버린, 오랜 친구들이 다시 연락이 온다거나 하는 꿈.
역시,
외로운가 보다.
나는 혼자 잘 논다고,
가족들에게 쏟을 에너지도 부족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여력이 없다고, 그럴 돈도 시간도 아깝다고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꿈이 말해준다.
응, 아니야. 너 외로워.
어제는 또 다른 내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는 꿈을 꾸었다. 거기에서 나는 특수교사였다.
희안하다. 한번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직업인데......
꿈에서 난 노련하게 학생들을 다루었고 돌발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했다. 경력이 많은, 학부모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인기 많은 선생님.
깨고 나니 역시 기분이 별로였다.
아침 6시, 늘 저절로 눈이 떠지는 시간.
별로인 기분으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두시간쯤 보다가 일어나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고 출근했다.
별로인 직장으로.
하루종일 꿈 생각이 났다. 왜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 그런 실감나는 꿈들을 꾸는 걸까?
생각은 끝도 없이 뻗어갔고...... 그 생각은
또 다른 태양계 어딘가,
모든 조건이 지구의 생성 조건과 똑같은 곳에서 지구가 생기고, 지구의 역사가 반복되고, 나랑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거기에도 생겨서 살고 있는데 문득 시공간을 초월해서 내 머릿속에 닿은 건 아닐까? 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일리가 있다.
어릴 적 인연들과 여전히 잘 지내는 그 곳에서의 나.
이기적이지 않고 버림 받지 않는 그 곳에서의 나.
번듯한 직업을 보다 이른 나이에 찾은 그 곳에서의 나.
결혼하지 않고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그 곳에서의 나.
재벌집 막내 딸로 태어나 손 대는 사업마다 성공시키는 그 곳에서의 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 곳에서의 나.
사실 그 곳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주는 무한하니까 어느 태양계에 지구와 같은 별이 몇 개나 될지도 모르고, 조건이 비슷하다면 나 같은 사람은 꽤 여러 명이 생겨나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을지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랑 똑같이 생긴 그 또 다른 나는 어쩌면 사람들과 좀더 원만히 지내며 다른 선택을 해서 이 곳에서의 나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려나?
내가 그 곳에서의 나를 꿈꿀 때,
그 곳에서의 나도 이 곳에서의 나를 꿈꿀까?
그리고 그 꿈에서 깼을 때 기분이 어떨까?
돈은 좀 없고 원하던 직업은 가지지 못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기적을 경험하고, 그렇게 가정을 이뤄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매일을 함께하는 기분 좋은 꿈이었을까?
아니면 명품 하나 없이, 집도 없이, 번듯한 직업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못 가고 하루하루 소처럼 개미처럼 일해 푼돈이나 벌며 살아가는 기분 나쁜 꿈이었을까?
또 밤이 온다.
오늘은 꼭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