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
봄바람이 분다.
비록 흙바람이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온도의 바람이 분다.
출근길 차에서 이문세의 <봄바람> 을 들었다.
휘파람이 나오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봄바람처럼 살랑,
계절과 날씨가 주는 감정의 동요에 흠뻑 젖어본다. 이유 없이 마음이 설레는 요즘이다.
보통 사람의 일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비유하고 중년을 가을로, 노년을 겨울로 두지만......
사실 늙어도 봄은 온다.
늙어도 마음은 봄바람처럼 살랑일 수 있다.
날이 좋고, 1~2월에 비해 일이 한가하니 사색의 시간이 길어지고 마음은 들뜬다.
괜히 뭐 살 거 없나? 수시로 쇼핑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거창한 걸 사는 건 아니다.
그냥 아주 소소한 사치를 부린다.
매일 3천원짜리 립밤만 쓰다가 2만원짜리 립밤을 사본다.
만원짜리 칼국수를 사먹다가 만오천원짜리 들깨칼국수를 사먹는다.
멀쩡한 폰 케이스를 화사한 색깔로 바꿔보고,
아직 반이나 남았지만 괜히 향 좋기로 소문난 비싼 핸드크림을 사서 발라본다.
고작 그런 걸로 행복해진다.
고작 그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는 스스로가 기특하다.
하루종일 개미처럼 일하고 아이들 챙기고 밤에 누워도 한 동안 볼 게 없어 심심했는데
볼만한 컨텐츠가 많아져서 그것도 좋다.
<폭싹 속았수다> 를 보고 있다. 순서대로 보지는 않는다. 자꾸 울어서 눈이 부어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지경이다. 그래서 유튜브 쇼츠로 보다가 더 보고 싶은 장면이 있으면 넷플릭스로 찾아보고 그런다.
특히 최근 관계에서 다친 나의 마음을 다독여준 건 영범 엄마.
그렇게 싫어하던 며느리 감을 떼어놓고 본인 마음에 쏙 들도록 아들의 혼사를 성공시키고도 불행한 그녀의 결말이 너무나 통쾌했다.
예전 직장상사가 떠올랐다. 앙칼지고 1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매일매일 동동 거리던 그 사람.
기어코 본인에게 유리하게끔 완벽하게 업무 분장을 하고,
그러고도 욕은 먹기 싫어 매 순간 자기 입장을 변명하며 상대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에 온 힘을 쏫았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결국 병이 났다. 중병 진단을 받더니 우울증도 왔다며 그 완벽한 업무분장을 누리지 못하고 퇴사해버렸다. 인상도 영범 엄마와 똑같아서 폭싹을 보며 어쩌면 더 통쾌했을지도.
그만큼 배우의 연기력이 훌륭했던 거겠지.
아마 앞으로도 내 인생에 있을 여러 선택의 기로들에서, 난 그녀를 떠올릴 것 같다.
아들의 결혼사진에서 혼자 활짝 웃고 있던 모습.
그 사진이 걸린 거실에서, 평생 며느리 눈치에 시든 뒷방 늙은이의 모습.
작가는 도대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토록 면밀하게 지표를 제시하는 걸까?
동백이도 참 좋았는데 애순이도 금명이도 좋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부자가 되지 않아도 결국 행복한 이야기는 엄청난 힘을 가진다.
밤마다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서 볼 드라마가 있어 만족스럽다.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다. 내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흥미진진한 남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말 한 마디, 태도 하나하나에도 배려를 담아야 한다.
적극적인 선행을 베푸는 것도 좋지만, 소극적인 선행은 일상에서 사소한 배려를 습관화하는 거겠지.
요즈음은 그래서 누군가 웃긴 말을 했을 때,
그냥 웃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모두를 빵 터뜨린 그의 말 한마디에 괜한 드립 하나를 얹어 웃음의 시선을 내게 뺏어오지 않고,
그런 개그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그저 그 사람의 말에 깔깔 웃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가을의 사색과 달리 봄의 사색은
이토록 화사한 느낌이다.